옛날 인도에 어떤 성자가 있어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새날이 온 것을 어떻게 아느냐?” 제자들은 각자 생각을 모아 나름대로 대답한다.
“먼동이 튼 것을 보고 압니다”라고 한 제자가 말하자 스승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다른 제자가 “산천초목이 보이기 시작하면 새날이 온 것입니다”라고 말했지만, 스승의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또 다른 제자가 답한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새날이 온 것입니다.” 이번에도 스승은 조용히 고개를 젓기만 한다.
제자들이 답답한 나머지 질문한다. “그러면 스승님께서는 새날이 온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그러자 스승은 눈을 감은 채 오래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렇게 말한다. “날이 밝아 너희들이 밖을 내다보았을 때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너희 형제들로 보이면 그때 비로소 새날이 온 것이다.”
최근 장편소설을 펴낸 한 소설가의 ‘작가의 말’을 통해 다시 듣게 된 이야기다. 새날이 온 것을 어떻게 아는가? 오래 전 인도 성자가 제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을 반복해 체험하다 보면 새날에의 소망이나 비전을 지니기 쉽지 않다. 새날이 올 것이라고, 복음처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아무리 진정성을 갖춰 호소한다 하더라도, 양치기 소년의 운명을 벗어나기 어렵다.
현대인의 시간 단위는 하루, 한 주, 한 달, 일 년…, 뭐 이런 식으로 분절되게 마련이다. 오늘 하루만, 이번 주까지만, 이번 달까지만, 올 연말까지만, 이렇게 살며 버티자, 그런 작정들을 많이 한다. 그런데 내일이 되어도, 다음 주가 되어도, 또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내 삶이 바뀌지 않고 내가 사는 세상이 변화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참으로 속절 없어진다. 그러다 보면 삶이 참으로 비루하고 누추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에 새날에의 소망마저 슬그머니 내려놓게 된다.
어떤 이들은 과감한 단절, 결단 같은 것들을 강조하기도 한다. 예부터 새로운 창조는 분리로부터 발원한 것이 많았으므로 그럴 듯한 이야기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분리이고 단절일까. 어디서부터 변화라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지점이 다시 문제된다. 자칫하면 심한 상대성의 소용돌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다. 우선 세심하게 미분화된 사고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사태의 단면들을 잘게 쪼개어 생각하다 보면 의외로 변화의 정도를 가늠하기가 쉬워진다. 눈이 침침해졌을 때 정교한 렌즈나 돋보기의 도움을 받아본 사람이면 다 안다. 작지만 다른 것들이 얼마나 많을지를 말이다.
미분화된 사고로 작은 변화를 인지할 수 있을 때 우리네 삶의 감각은 더욱 정교해지고 깊어진다. 작은 도움에도 감사할 줄 알고, 인연이 덜한 사람들도 환대할 수 있는 마음이 변화를 견인한다. 또 작은 슬픔을 겪는 이웃에게 진정으로 연민의 정을 보냄과 동시에 자기연민도 동시에 수행하면 변화 속에서 더욱 깊어질 수 있다.
새봄 식탁에 제격인 돋나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새날이 왔음을 느낀다. 인도의 오랜 스승이라면 필경 고개를 가로저었을 것이다.
지난 겨울 그 추운 나날들을 견디며 생명의 기운을 모아왔을 돋나물이 참으로 싱싱하고 장하다. 춥고 어두운 흙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새봄과 더불어 일구어낸 돋나물이야말로 새날의 징표가 아니겠는가. 그 생명을 알아보고 환대할 수 있을 때 지나다니는 이웃들도 형제처럼 환대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 그 새 생명의 돋나물을 먹을 수 있었으므로 어제와는 다른 삶을 산 것 같다. 그게 봄기운의 매력이다.
글·우찬제(문학평론가·서강대 문학부 교수) 2014.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