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 대통령은 2021년 6월 29일 대통령선거 출마 선언문에서 “무너진 자유민주주의와 법치, 시대와 세대를 관통하는 공정의 가치”를 다시 세우겠다고 다짐했다. 자유가 빠진 민주주의만을 추구하려 했던 지난 정권은 거대 의석에 기반한 ‘이권 카르텔’을 형성해 ‘권력을 사유화하고 국민을 약탈’하는 ‘독재요 전제’라고 비판했다. 모든 국민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 ‘정부의 권력 한계’를 규정하는 자유민주주의의 확립을 천명했다.
윤 대통령은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재정립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경험은 지금까지 앞글에서 논한 자유민주주의 원형과는 차이가 확연하다. 서구 전통의 자유민주주의가 한국 사회에 이식된 이래 자유주의는 실종되고 민주주의만이 확장되는 기형적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되고 말았다. 사실 자유주의가 소외되고 민주주의는 과부하가 걸린 게 한국 상황이다. 창의성과 다양성, 번영과 풍요, 평화와 공존을 기약하는 자유민주주의만이 미래 한국의 대안이다.
과거 군부독재나 보수 정권이 냉전적 반공주의를 통해 국가권력의 남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를 이용했다는 주장은 일리 있다. 특히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이 헌법 전문에 처음 들어간 것은 1972년 유신헌법에서이며 이때 국민의 기본권이 더욱 제한됐음은 자명하다. 북한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를 지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위한 개발국가를 통해 정경유착과 불균형 발전을 도모함으로써 보수 기득권층에 특권을 제공했다.
그러나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도입 과정을 고찰해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요인이 있었다.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는 함석헌의 말처럼 자유민주주의도 광복 후 미 군정과 함께 뜻밖에 왔다. 전통적 유교문화와 봉건적 사회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인에게 자유민주주의는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으로부터 해방되자마자 서양 문물이 갑작스럽게 들어와 엄청난 문화적 충격과 혼돈을 가져왔다. 당시 사회적 혼란과 방종의 일탈 현상은 화제의 장편소설 <자유부인(1954)>에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
자유의 축소, 민주의 확대
이승만정부는 북한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를 국가의 정치 사회 시스템으로 채택했다. 그런데 제도적 차원에서는 자유민주적 틀을 건설했으나 운영적 차원에서는 권위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계속된 좌파세력의 준동으로 그해 12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고 6·25전쟁은 냉전적 자유주의가 국정철학의 기조가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박정희정부에서는 반공을 국가이성으로까지 확대했고 산업화의 시대 과제에 밀려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는 설 자리를 잃었다.
비록 자유민주주의는 반공과 산업화로 왜곡됐지만 자유민주적 제도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 중심의 젊은 세대는 민주 세력으로 성장했고 권위주의에 도전했다. 이른바 독재 대 민주의 대결 구도였고 4·19혁명과 6·3항쟁 때까지만 해도 ‘자유’와 ‘민주’ 두 가치 모두가 쟁점이었다. 그런데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민주화 세력의 좌경화가 뚜렷해졌다. 자유의 ‘명목적’ 가치는 보수 세력의 전유물로 전락했다.
그중에서도 과격한 운동권 세력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심취했고 이탈리아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지전(war of position) 전략에 따라 노동계, 교육계, 학계, 법조계 등의 분야에 침투해 기존 질서의 타파를 도모했다. 이들은 정부 수립 후 최초 정권교체인 김대중정부와 연합했고 최초의 진보 정권이라고 할 수 있는 노무현정부에서는 개혁 세력으로서 일익을 담당했다. 노무현정부는 국민에게 개혁 정신을 심는 데는 성공했으나 국민통합에는 실패했다. 이들은 기득권 세력을 보수·수구로, 개혁 세력을 진보·민주로 이분화했다.
자유주의 가치로 자유민주주의 회복해야
운동권에게 자유민주주의는 자본가계급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지배이념에 불과했다. 이들은 민주화 과정에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기 위한 자유주의 가치가 기득권층의 특권을 옹호하는 허위의식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진보 정권 2기 문재인정부에서 386세대가 기득권력으로 자리잡았다.
자유주의 관념과 가치를 홀대한 진보 세력은 왜곡된 민주주의를 초래했다.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는 확증편향적 탈진실의 시대에 접어들어 퇴보의 길을 걸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경고했던 민주정치의 타락 현상이 우려되는 상황의 전개였다.
도덕성이 결여된 민주주의는 자유주의 가치로 치유돼야 한다. 왜곡된 자유민주주의의 한국적 경험을 바로잡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가치가 균형을 이루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구현이야말로 한국 민주주의가 나아갈 길이다. 이제 한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 구조적 요건을 갖췄다. 시모어 마틴 립셋에 의하면 자유민주주의의 전제조건은 어느 정도의 개별주의 의식과 경제적 자유를 누리는 중산층이 형성돼야 하고 활동적인 시민사회가 광범위하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진사회로 진입이냐 좌절이냐의 갈림길에 선 한국으로서는 자유민주주의 제자리 찾기란 선택이 아닌 시대정신이다. 자유주의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진화·발전해왔기 때문에 생명력이 있다. 한 번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자유주의의 회복과 민주주의의 선진화를 위한 한국적 자유민주주의 개발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기다.

양승함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한국정치학회장을 역임했으며 통일부 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 연세대 행정대학원장, 국가관리연구원장을 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