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구례·곡성
비오는 날의 여행을 즐기지 않는 사람도 전남 구례군에 가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 천은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천은사 입구에 서면 보슬보슬 내리는 봄비가 더 없이 운치 있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천은저수지를 끼고 한 바퀴 돌아 천은사 소나무숲까지 걷는 3.3㎞의 길 이름은 ‘상생의 길’이다.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관광 100선에 이름을 올린 관광명소다.
상생의 길이라는 이름은 고즈넉하게 푸른 지리산 자락과 얼핏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세 구간의 상생의 길 중 ‘누림길’ 입구에 있는 알림판을 읽어보니 명명에 납득이 간다. 예전에는 천은사 매표소가 지리산 자락의 성삼재로 가는 길에 있어 탐방객들과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2019년 환경부와 국립공원공단, 천은사 등 8개 관계기관이 협력해 문화재관람료를 폐지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2020년 조성한 길이 천은사 주변의 상생의 길이다.
천은사를 둘러 도는 소나무숲길의 이름은 ‘나눔길’이다. 1㎞ 남짓 숲이 우거진 길은 싱그러운 기운을 나눠준다. 천은사에 진입하는 수홍루에서 제방을 따라 천은사 산문까지 걷는 ‘보듬길’은 1.6㎞ 길이로 수변길이다. 천은사 산문 앞에서 수홍루까지 걷는 0.7㎞의 길은 누림길이라고 이름 지었다. 누구나 걸을 수 있는 무장애 탐방로다.
푸른 소나무숲에서 즐기는 명상
비오는 4월 마지막 주말, 상생의 길을 걷기 전에 챙겨 간 우비를 입었다. 평소에 우비 입을 일이 거의 없었는데 두 손이 훨씬 자유롭게 느껴졌다. 주머니에 스마트폰 하나만 넣고 가벼운 차림으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누림길에서 시계 방향으로 보듬길을 향해 걷다 보면 천은저수지 전망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지점이 나타난다. 흐린 하늘이 뿌옇게 내려앉은 수면에 건너편 숲이 비쳐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사진을 찍지 않을 수가 없다. 곳곳에 놓인 벤치가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느긋하게 경치를 감상하라고 만들어놓은 것이다.
혼자 걸으며 호젓함을 즐기면 풍경이 마음에까지 들어온다. 귀에 꽂은 이어폰도 잠시 넣어두자. 세상의 음이 소거된 곳, 마음의 소리를 따라 명상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누림길에서 보듬길까지 이어지는 길 위에서는 딱히 할 일이 없다. 눈길 한 번 옮기고 감탄 한 번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수면을 바라보다 다시 걷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천은사 수홍루에까지 다다르면 잠시 숨 돌릴 겨를이 생긴다.
천은사에서는 2024년 말까지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다소 시끄럽게 느껴지는 공사 소리는 천은사 내부에 들어가면 작아진다. 지리산 3대 사찰이라고 하지만 규모가 크지 않다. 천은사는 통일신라 중기인 828년에 창건됐다고 알려진다. 지리산 중턱에 있다보니 접근이 쉽지 않아 조선 전기에는 소실되기도 했다. 가장 큰 법당인 보물 극락보전도 1774년에 중수하며 세워졌다. 웅장하지 않지만 소박한 위엄이 있어 저절로 발소리를 줄이게 된다.
보물로 지정된 천은사 극락보전 아미타후불탱화도 놓치지 말자. 극락보전의 중심에 있는 아미타불 뒤쪽에 있는데 아랫부분이 가려져 있어 전체 모습을 확인하려면 안내판을 봐야 한다. 1776년(영조 52년)에 제작된 이 그림은 신암 스님을 비롯해 14명의 스님이 함께 그린 것이라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탱화를 제작하며 기록하는 글 마지막 부분에 ‘공덕이 누구에게나 두루 미쳐 모든 중생이 다 함께 불도를 이루기를 기원한다’고 적혀 있다. 그림 곳곳에 적힌 글귀도 ‘다 함께’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천은사를 둘러싼 상생의 길이 천은사를 짓고 보존해온 의지와 합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상생의 길이 나이, 성별, 종교, 직업에 관계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게 만들어놓은 길이기 때문이다.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나눔길을 걷다보면 울창한 소나무숲 속에 명상쉼터가 나온다. 평소 명상을 해본 적 없지만 앉아서 잠시 눈을 감아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계곡 물소리가 숲 밖에서 가지고 온 번뇌를 시원하게 씻어 내린다.
숲을 지나 평탄한 포장길을 따라 걷다보면 수령 300년이 됐다는 소나무가 보인다. 1950년대 말까지는 천은사 주변에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소나무가 우거졌다고 한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대부분 벌채됐고 지금 소나무숲길을 이루는 나무들은 대부분 그 이후에 심어진 것이다.
길 맞은편에는 야생차밭이 있다. 천은사뿐 아니라 지리산 자락에 있는 화엄사 등에는 차 밭이 많이 있다. 한국의 차가 시작한 지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사기’에 828년 대렴이 당나라에서 차 씨앗을 가져와 구례에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리산 아래 하동 녹차가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배경이다.
상생의 길을 천천히 걸으며 휴식을 취하고 문화재를 탐방해도 두세 시간이면 충분하다. 점심 무렵 도착해 오후 시간을 보내고 천은사 방장선원의 한 방사 앞에 앉으면 느긋한 하루가 지나간다.
수천만 송이 장미 피어나는 곡성세계장미축제
상생의 길이 쉼을 준다면 차로 40분 거리의 전남 곡성군에서는 화려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제14회 곡성세계장미축제’가 5월 17일부터 26일까지 10일간 열리기 때문이다. 1000여 종이 넘는 수천만 송이 장미가 활짝 피어나는 섬진강기차마을의 장미축제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축제다.
섬진강기차마을은 1933년 건립돼 사용되던 옛 곡성역과 1998년 폐선된 전라선을 활용해 만들어진 관광명소다.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여는데 축제기간 동안은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드나들 수 있다고 한다.
섬진강기차마을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장미공원, 옛 곡성역사를 중심으로 한 증기기관차·레일바이크 등 탈것 승강장, 놀이기구가 모인 드림랜드 등이다. 대개는 곡성역사에서 일정을 시작한다.
곡성역사 주변으로는 추억에 젖을 만한 콘텐츠가 많다. 정문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펼쳐진 저잣거리에는 만화방이며 무인매점이 있다. 앞쪽으로 펼쳐진 철길은 실제로 증기기관차가 다니는 길이다. 하루에 다섯 번 가정역과 기차마을 사이를 왕복하는 증기기관차를 타고 섬진강 줄기를 감상할 수 있다. 대개 기차마을에서 가정역까지 30분, 가정역에서 휴식시간 15분, 가정역에서 기차마을까지 다시 30분, 총 1시간 15분이 소요되지만 지루하지 않다. 사계절 모두 다른 섬진강변 풍경을 즐기면서 추억의 간식 카트를 기다리다 보면 1시간 걸리는 왕복 길도 짧게 느껴진다.
증기기관차가 승강장에 들어설 때는 “뿌우” 하는 기적소리가 울린다. “칙칙폭폭” 엔진소리도 옛 기억 그대로다. 기차 기적소리를 들어본 적 없는 아이들은 왜 기차소리를 ‘뿌우’, ‘칙칙폭폭’이라고 하는지 깨닫고는 환호성을 지른다. 고속열차에서는 느끼기 힘든 낭만이 있다.
증기기관차 승강장을 중심으로 한쪽은 드림랜드, 한쪽은 장미공원으로 나뉜다. 드림랜드 근처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넘친다. 드림랜드와 인근에 있는 모형열차 안 치치뿌뿌놀이터는 유료로 운영된다. 아이와 함께 이곳에 가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갈 각오를 해야 한다.
드림랜드 반대편에 있는 장미테마정원은 중국,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등 일곱 주제의 장미원으로 조성돼 있다. 중국 장미원은 중국 쑤저우의 유명한 정원 졸정원의 축소판 같다. 그리스 장미원에는 그리스 신전에서나 볼 수 있는 도리아식 기둥이 우뚝 서 있다.
5월 장미축제가 시작되기도 전 이곳은 장미향기로 넘친다. 향기를 담지는 못하지만 장미 여인이라고 불리는 조각상, 장미넝쿨로 장식된 터널 곳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호젓하고 푸른 구례, 색색이 화려한 곡성, 어느 쪽을 선택하든 5월의 낭만을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김효정 기자
박스기사
지리산 천은사(상생의 길·소나무숲길)
주소 전남 구례군 노고단로 209
문의 061-781-4800(천은사 종무소)
이용시간 제한 없음
이용요금 무료
섬진강기차마을
주소 전남 곡성군 오곡면 기차마을로 232
문의 061-363-9900(증기기관차 및 레일바이크 문의),
061-363-8379/061-360-8419(관광안내 문의)
이용시간 평시 오전 9시~오후 6시
이용요금 개인 대인 5000원, 소인 및 경로 우대자 4500원, 곡성군민·국가유공자·장애인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