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거요? 어휴, 말도 못했죠. 엔저로 그 당시 한 아이템에 5천만원씩 손해를 입게 생겼더군요.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아 사업을 접어야 하나 고민이 많았습니다.” 에이치앤드 에이치 김한규(44) 대표는 이렇게 말하며 손사래를 쳤다. 김 대표가 말한 ‘당시’란 2005년 무렵이다. 그때도 엔저가 극심해 원·엔 환율이 700원대로 폭락했다. 이때문에 일본에 수출하던 배터리나 OPP테이프 등은 수익이 나지 않아 중도에 접어야 했다.
그가 예전 일을 떠올린 것은 최근 엔저로 또 한번 위기가 찾아 들어서다. 하지만 그때 경험이 기업가로서 한층 성숙한 대응을 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리고 엔저 위기를 극복하는 다양한 방법을 터득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김 대표는 2007년 중소기업청으로부터 수출전문가 위촉장을 받았다. 그의 회사는 2009년 산업통상자원부(당시 지식경제부)가 선정한 대일 수출유망기업에 포함됐다. 엔저를 굳게 버티며 얻어낸 훈장이었다.
에이치앤드에이치는 주로 건축기자재를 수출하는 무역회사다. 최근 마스크팩 등 일반 소비자를 겨냥한 화장품 제조·수출로도 사업을 확장했다. 에이치앤드에이치의 지난해 매출은 30억원. 이 가운데 일본에서 발생한 매출이 80퍼센트에 달할 정도로 비중이 크다. 이처럼 대일 의존도가 높은데도 엔저라는 악재를 딛고 선방한 것이다.
비결은 뭘까. 김 대표는 2005년 무렵의 교훈을 잊지 않고 있다. 환율 변동에 유념하면서 사업에 필요한 정보를 모으는 데 주력한 것이 주효했다.
“수년간 일본을 오가면서 환율이 어떤 때 출렁이는지를 유심히 살폈죠. 한국에서 뉴스나 보고서로 1차 정보를 얻은 다음에는 현지에서 바이어들과 직접 만나 끊임없이 정보를 주고받았습니다. 전화상으로 안부를 주고받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양질의 정보가 오갔죠. 이런 과정 속에서 일본 정권이 바뀔 때마다 환율 정책이 일정하게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때문에 일본에서 ‘아베노믹스’가 시작되면서 어느 정도 엔저가 있을 것이라 예측하고 미리 준비할 수 있었다. 대응 방안은 현지 조사를 통해 찾았다.
“환율 변동폭이 커졌을 때, 우리 회사가 파는 제품군의 가격대가 시장에서 어떻게 형성되는지 알기 위해 현지 조사를 수없이 하고 다녔습니다. 예컨대 독일산 세면대가 우리 제품과 품질 면에서 별 차이가 없는데도 가격은 훨씬 비싸게 책정됐더군요. 해당 기업이 엔저를 고려하지 않고 기존대로 가격 마지노선을 일방적으로 정한 거였죠. 우리가 바이어들에게 이를 어필했더니 우리 제품에 매력을 느꼈는지 바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김 대표는 이때부터 세면대라는 전략품목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일명 ‘종합아이템 전략’을 세웠다. 수익이 나는 전략품목에다 손실이 발생하는 품목을 묶어서 파는 전략이다. 수익이 나는 것만 팔려 해서는 일본 바이어들이 가격 메리트를 못 느껴 계약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품목을 패키지처럼 같이 공급했다. 바이어가 “우리는 이런 것 취급 안 한다”며 손사래를 쳐도 먼저 나서서 제안했다.
볼펜에서는 손해보더라도 노트에서 남는 장사
비유하자면 볼펜과 노트를 같이 파는 식이다. 볼펜에서는 손해를 보더라도 노트에서 더 많은 이익이 나면 결국 ‘남는 장사’라는 것이다. 주업종인 건축기자재로 보면, 엔저일 때 바닥자재 등이 볼펜이고 세면대 같은 위생도기가 노트가 된다. 김 대표에 따르면 위생도기는 엔저로 예전보다 이익률이 다소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30퍼센트 이상 마진을 붙여 팔 수 있는 전략품목이다.
“한 명의 바이어에게 바닥자재와 세면대를 동시에 납품하는 겁니다. 우리가 위생도기만 제값 받고 팔기를 고집해서는 (엔저에) 어떤 일본 기업이 거래에 응하려 할까요? 그들이 집 지을 때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다 제안해 관심을 끄는 거예요. 바이어에게 ‘우리는 모든 걸 납품할 수 있는 기업이고 어떤 요구에든 맞춰줄 수 있다’는 신뢰감을 줄 수도 있었습니다. 한 품목만 가진 기업은 바이어가 언제든 내칠 수 있지만, 여러 품목을 보유하면 쉽게 내치지 못하더군요.”
김 대표는 “엔저일수록 기업들이 본전(제조원가)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예전만 못한 마진을 남기더라도 바이어들과 돈독한 관계 속에 꾸준히 거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엔화 가치가 다시 올라가면 그때 이들을 통해 훨씬 많은 이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일본 바이어들로서는 자국제품보다 30~40퍼센트 싸지 않으면 수입할 이유가 없다”며 “내가 팔려는 제품군의 현지 가격을 정확히 알아봐야 하는 이유도 이때문”이라고 말했다. ‘종합아이템 전략’도 ‘무조건 우리 회사 이익이 얼마만큼 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면서 얻은 전략이다.
에이치앤드에이치는 지난해부터 엔화 결제 비율을 높이고 있다. 일본에 수출할 뿐 아니라 수입도 하기 때문에 가능한 엔화로 수입대금을 결제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엔화 결제 비율이 전체의 40퍼센트였지만 엔저가 본격화한 이후 60퍼센트까지 끌어올렸다. 거래처도 엔저를 감안해 견적을 주기 때문에 어려움은 없었다. 서로 환리스크를 같이 대비하자는 겁니다. 단지 편하다는 이유로 결제 시스템을 원화나 달러화에만 의존하면 또 다른 리스크가 따르는 것 같아요.”
최근에는 엔저 장기화에 대비해 수출선 다변화에도 나섰다.
건축기자재에 익숙한 그가 화장품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한 것도 그래서다. 말레이시아를 잠재력 있는 신흥시장으로 보고 올해부터 화장품 수출에 나설 계획이다.
김 대표는 “항상 환율에 유념하면서 사업을 해 왔기 때문에 엔저 위기가 불거지기 이전부터 말레이시아 진출 구상을 할 수 있었다”며 “수출선 다변화로 올해는 150억원의 매출을 달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이창균 기자 / 사진·지미연 기자 2014.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