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미술관 전경©Ken Lund from Reno, Nevada, USA
미국 중서부 최대 도시 시카고는 지명부터 특이하다. 시카고란 이름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으로 18세기까지 이 지역 일대에 살았던 포타와토미족 말로 야생 마늘을 일컫는 시카콰(shikaakwa)를 프랑스어로 음차(音借)한 세카고우(Shecagou)에서 유래됐다. 야생 마늘이 지천으로 깔린 지역적 특성을 지명으로 삼은 것이다.
시카고는 또 오대호(五大湖)의 도시다.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에 접한 오대호 중 두 번째로 큰 미시간호 서남쪽에 붙어 있다. 시카고는 행정구역상으로는 일리노이주 북동부에 자리하며 인구 270만 명으로 뉴욕, 로스앤젤레스에 이어 미국 3대 도시다.
시카고는 초고층 건물을 뜻하는 마천루의 도시이기도 하다. 1885년 시카고에 들어선 10층짜리 철골·석재 건물인 홈 인슈런스 사옥이 세계 최초의 마천루다. 목재가 아닌 철과 돌을 이용한 획기적인 건축공법으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근대건축의 상징으로 불리는 건물이다. 미국에서 뉴욕 다음으로 마천루가 즐비한 도시인 시카고가 근대건축의 산실로 기록된 데에는 가슴 아픈 역사가 있다.
1871년 10월 8일 밤 9시, 시카고의 한 헛간에서 원인 불명의 화재가 발생했다. 당시 시카고 전역의 건물 3분의 2가 목재 건축물이었는 데다 보도와 심지어 도로마저 나무로 건설돼 피해는 상상을 뛰어넘었다. 도시 건물의 3분의 1이 전소하고 300여 명이 사망했으며 이재민만 10만 명을 넘었다. 비극적인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폐허의 땅, 시카고를 재건하기 위해 당국은 대대적인 도시 정비 건설 사업에 착수했다. 화재에 취약한 목재 대신 철과 돌, 유리를 건축자재로 사용하는 철골 및 석재공법을 앞세운 근대건축의 미학은 이 시기에 확립됐다.
▶시카고 미술관 내부©Michael Barera
▶2009년 5월에 개관한 시카고 미술관 모던 윙©Fetchcomms│©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세계 컬럼비안 박람회가 열린 시카고 미술관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인 시카고의 대표적인 마천루로는 외관이 옥수수를 닮아 쌍둥이 옥수수 빌딩으로 불리는 65층 규모의 마리나 시티(1968년 완공), 100층짜리 레지던스 빌딩인 존 핸콕 센터(1969년 완공), 1998년까지 세계 최고층 빌딩이었던 108층 규모의 윌리스 타워(1973년 완공), 98층 높이의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 앤 타워(2009년 완공) 등이 있다. 특히 마리나 시티는 독특한 건물 외관과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상복합 및 주차장 빌딩이라는 점에서 시카고의 상징물(랜드마크)이자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1893년 시카고에서는 의미 있는 국제 행사가 열렸다. 이탈리아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해 개최된 세계 컬럼비안 박람회로 명명된 만국 박람회다. 행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893년
12월 박람회 건물로 미술관을 이전 개관했는데 이 미술관이 바로 시카고 미술관이다. 영어 명칭(The Art Institute of Chicago)에 따라 ‘시카고 미술 연구소’ 또는 ‘시카고 현대 미술관’이 정식 이름이나 일반적으로 시카고 미술관으로 부른다.
1893년 5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4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시카고 만국 박람회에는 박람회 사상 처음으로 국가별 전시관이 등장했으며 당시 조선에서도 대표단을 파견해 한옥을 모델로 한 전시관을 선보였다.
특히 시카고 만국 박람회는 시카고 대화재 이후 20여 년에 걸친 대규모 도시재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고 계획화된 근대 도시로 탈바꿈한 시카고의 모습을 전 세계에 알린 문화 예술, 건축 행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시카고 미술관 내 시카고 미술학교©ajay_suresh
2009년 피카소 작품 등 소장한 신관 개관
시카고 미술관의 역사는 시카고 대화재 이전인 시카고 디자인 아카데미(Chicago Academy of Design)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866년, 30여 명으로 구성된 예술가 단체가 시카고 디어본 거리의 자그마한 스튜디오에 설립한 디자인 학교가 시카고 미술관의 전신이다.
1870년 날로 늘어나는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디자인 학교는 인근의 건물로 옮겨 수업을 진행하던 중 1871년에 터진 대화재 때 소실됐다. 우여곡절 끝에 디자인 아카데미를 이끌던 예술가들은 1879년 미시간 애비뉴에 시카고 미술 아카데미(Chicago Academy of Fine Arts)란 이름으로 기존의 디자인 학교를 계승 발전시킨 조직을 세웠다.
3년 후인 1882년 미술 아카데미는 현재 명칭인 시카고 미술 연구소로 개명한 데 이어 1893년 만국 박람회 장소로 다시 터전을 옮기게 됐다. 남부 미시간 애비뉴 소재의 박람회 건물은 행사 후 미술관으로 용도 변경된다는 계획에 따라 건축됐다.
2009년 5월 16일 시카고 미술관은 ‘모던 윙’(Modern Wing)이라고 이름 지어진 신관을 개관했다.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건축가 렌조 피아노(1937~)가 설계한 신관은 2만 4500㎡(7400여 평) 규모로 입체파 창시자 피카소(1881~1973)와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 등 20세기 현대 미술품과 건축, 디자인, 사진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전시 공간 외에 강당과 강의실, 카페, 기념품점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2009년 시카고 혁신상(Chicago Innovation Awards)을 받았다.
▶그랜트 우드, ‘아메리칸 고딕’, 목섬유 판자에 유화, 78×65.3cm, 1930
동서양·시대·장르 망라한 30만여 점 소장
본관과 신관으로 이뤄진 시카고 미술관의 전시 공간은 총 9만 3000㎡(2만 8100여 평)에 이른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이어 미국 내에서 두 번째로 크다.
본관은 인상주의 및 후기 인상주의를 중심으로 한 유럽 미술이, 신관은 현대 미술과 미국 미술 위주로 전시 공간이 꾸며져 있다. 본관 지하에는 1912년에 문을 연 라이어슨&번 햄 도서관’이 있다. 미술사와 건축 분야 미국 내 최대 규모의 도서관이다. 미술관 부설로 운영하는 미술 연구소와 미술학교도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한다.
시카고 미술관의 컬렉션은 유럽과 미국 미술 외에 동양 미술, 중세미술, 장식 미술, 사진, 판화, 조각, 건축 등 다양한 지역과 시대, 장르를 망라한 30만여 점에 이를 정도로 방대하다.
유럽 미술 컬렉션에서는 특히 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 회화가 돋보인다. 모네(1840~1926)와 마네(1832~1883), 드가(1834~1917), 르누아르(1841~1919), 피사로(1830~1903) 등이 그린 주옥같은 인상파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수련’ 연작으로 유명한 모네의 그림을 30점 넘게 소장하고 있는 것이 매력적이다.
쿠르베(1819~1877)와 밀레(1814~1875), 고흐(1853~1890)와 고갱(1848~1903) 작품도 컬렉션에 포함돼 있다. 인상파 그림 중 관람객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작품은 후기 인상파이자 점묘주의를 창시한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가 첫 손에 꼽히고 있다.
▶클로드 모네, ‘수련 연못’, 캔버스에 유화, 89.8×101cm, 1900
▶조르주 쇠라,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캔버스에 유채, 207.5×308cm, 1884~1886│©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지역 사회·학교 등 대상 교육 프로그램도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붓 터치가 아닌 작은 색 점들을 찍어 완성한 그림인 점묘화의 상징과도 같은 쇠라의 대표작이자 과학 이론을 미술에 적용한 최초의 그림이다. 화창한 휴일 오후, 그랑드 자트 섬을 찾아 한가롭고 평화롭게 휴식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을 그린 장면이다.
종전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추구한 빛의 순간적인 인상 포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눈에 보이는 빛에 생명을 불어넣어 형태의 질감과 공고성을 표현하는 데에 성공한 그림이다. 색을 혼합하지 않고 서로 다른 색 점들을 병치해 찍은 결과 보색효과와 함께 그림을 보는 우리 눈이 시신경과 뇌의 신호에 따라 자동으로 색을 혼합하는 색채 광선주의 효과 때문이다. 이 그림이 화소 기능이 우수한 카메라로 찍은 사진처럼 보이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밖에 미국 중서부 시골 마을의 일상을 가장 미국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그림인 그랜트 우드(1891~1942)의 ‘아메리칸 고딕’(1930)과 현대인의 고독을 밤의 지새우는 쓸쓸한 풍경 속에 녹여낸 에드워드 호퍼(1882~1967)의 ‘나이트호크’(1942)도 시카고 미술관이 소장한 걸작이다.
지역 사회와 학교, 어린이와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하고 유익한 교육 프로그램도 시카고 미술관의 자랑거리다.
박인권 문화 칼럼니스트_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