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의 맛’을 느끼게 해주는 음식들│윤진서
어릴 적부터 몸이 차고 저혈압이었던 나는 무더운 여름을 운명처럼 여겼다. ‘내가 8월에 태어난 것은 어쩌면 이런 몸을 잘 견디라고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태양 아래서 수영을 하거나 바닷가에 몸을 누이거나 모래사장에서 요가를 하며 10년을 보내니 어느새 저혈압도 사라지고 신기하게도 여름에 차가웠던 몸이 뜨끈해졌다. 꾸준한 운동 덕분인지 여름에 몸을 던져서 그런지 알 수 없으나 자연스럽게 여름을 살던 나는 그에 걸맞은 음식을 사랑하게 됐다.
제주도에 있는 우리 집에서 잠깐 기분을 달래고자 시원한 먹거리를 사러 대형 마트에 가려면 자동차로 15분을 달려야 한다. 대형 마트에 장을 보려고 나가면 장바구니 두 개를 챙긴다. 기왕 온 김에 이것저것 사려는 마음으로 담다 보면 하나 가지고는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주부라는 단어에 자부심을 느낄 만큼 요리 실력을 쌓았다. 봄이 되면 여러 청을 담그고 여름이면 잘 읽은 개복숭아주를 꺼내 얼음 한 사발을 부어 마시곤 한다. 복숭아 향이 향긋하게 여름을 감싸면 무더위도 잘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
제주의 여름이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기저기 땅속에 살던 벌레들이 안락한 곳을 찾아 집 안으로 들어오려 구멍을 찾아다니고 집 안에서 몇 번 지네를 만나기도 했다. 정원의 잡초가 더없이 무성해지고 진드기나 모기, 파리 유충도 개체 수를 늘리기에 바쁘다. 이럴 때 얼굴을 찌푸리고 있으면 한없이 그 이유를 찾기도 하지만 일단 팔을 걷어붙이고 콩을 쪄 갈아 콩국물을 만들고 오이채를 썰고 제주산 메밀면을 삶아 콩국수를 해 먹는다. 여기에 어제 만든 수박 화채 한두 덩어리를 같이 입안에 넣고 바깥의 푸르름을 바라보노라면 지네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긴다.
정원 텃밭에 열린 토마토를 따다 데쳐 껍질을 벗기고 매실청에 살짝 담가 며칠 기다렸다가 냉파스타를 해먹을 때 토마토 서너 개를 넣는다. 냉파스타와 함께 매실청에 탄산수와 레몬을 부어 마시며 여름이 가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이쯤 되면 ‘나는 여름을 사랑한 것일까, 여름 음식을 사랑한 것일까?’ 생각해보지만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여름 음식은 여름의 일부요, 여름의 장점이요, 여름의 묘미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 내게 여름의 맛이란 이렇다. 식당에 가서 먹는 평양냉면의 여름, 수제 맥줏집에서 맞는 여름, 마당에서 굽는 해산물의 여름, 우유 빙수와 팥고물의 여름, 해변에서 먹는 캔맥주의 여름, 잘 안 읽히던 책도 술술 읽힌다는 제주 바다의 여름, 화덕에 앉아 밤새도록 바라본 밤하늘과 차가운 화이트 와인의 여름, 한낮에 밖에 있다 들어와 마시는 냉수 한 사발의 여름도 기억에 남는 여름의 맛이다.
어쩌면 세상엔 좋은 것보다 좋지 않은 것이 더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 여름의 좋지 않은 점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입을 꾹 닫겠다. 사람이란 본래 좋은 것을 더 좋게 만드는 능력을 타고나지 않았던가. 그렇게 여름을 즐겨 보련다.

윤진서 배우_ 2003년 영화 <올드보이>로 데뷔 후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으며, 책 <비브르 사비> 등을 썼다. 최근 유튜브 채널 ‘어거스트 진’을 개설했다. 자연 친화적인 삶을 지향하며 제주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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