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 K-팝 산업은 기본적으로 3대 기획사인 SM엔터테인먼트(SM)·JYP엔터테인먼트(JYP)·YG엔터테인먼트(YG)가 주도하는 콘텐츠 위주의 제작 방식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기획사’라고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기본적으로 음반회사라기보다 탤런트 영입과 육성 역할을 맡아 음악 제작 노하우를 결합하는 프로덕션 회사에 가깝다. 이 때문에 이들이 비록 ‘거대 기획사’로 불리긴 해도 사업 운영은 대형마트가 아닌 구멍가게 방법론에 가까웠고, 오히려 국제 음반 비즈니스 질서에 비추어 보면 아마추어의 위상에 가까웠던 것도 사실이다. K-팝 제작에서 ‘시스템’이 확립되고, ‘테크놀로지’나 ‘플랫폼’의 역할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이 되지 않는다. 음악 제작 노하우는 20년을 넘어가고 있지만 음반 산업으로서의 K-팝은 이제 유년기를 끝낸 수준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연히 그간 K-팝의 주된 관심은 ‘제품’, 즉 콘텐츠였다. 이것은 어느 정도 정점을 찍었다. 첫 국제 기획 모델이었던 보아를 시작으로 세계 최고의 콘텐츠인 방탄소년단(BTS)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콘텐츠라는 관점으로만 바라본다면 K-팝은 여전히 불안한 산업이다. K-팝이 아무리 독창적인 음악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장르나 스타일에서 이는 서구적인 모델의 변용에 불과하다. 이를 K-팝은 ‘퍼포먼스’라는 관점으로 돌파했는데, 이는 콘텐츠 자체의 고유함이라기보다 정교한 노하우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같은 수준에 이르는 것 자체로 대단한 성과다. 지난 20년간 축적해온 이 콘텐츠는 당분간 어느 산업도 쉽게 모방하기 어려울 것이다. 전통적으로 아시아 시장을 이끌어온 일본을 넘어 이제 한국은 전통적인 영미권 음악 산업과 함께 새로운 글로벌 콘텐츠를 지속해서 쏟아낼 수 있는 유일한 산업으로 성장했다. 이 구도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플랫폼에 달려 있는 K-팝의 성패
콘텐츠 프로덕션 시스템 위주로 진화해온 K-팝이 플랫폼이라는 근본적인 시스템에 눈을 돌린 것은 유튜브를 비롯해 뉴 미디어의 성장을 목도한 이후였다. 변방의 음악 산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던 K-팝은 유튜브의 출범과 함께 비약적인 성공을 이뤄냈고, 이를 시스템의 질서를 우회하는 방편으로 활용했다. K-팝 특유의 시각적인 면모는 더욱 강화되었고, 이는 유튜브를 중심으로 한 ‘짤방문화’, 틱톡까지 밀레니얼 세대의 문화 소비 습관에 최적화된 콘텐츠로 각광 받았다.
이 같은 성향에 주목한 네이버는 2015년에 ‘브이라이브’라는 혁신적인 실시간 재생(스트리밍) 플랫폼을 출범해 아이돌의 일상을 담아내는 콘텐츠를 최초로 보급하기 시작했다. BTS는 유튜브, 브이라이브 등 소셜 미디어(생각·의견 등을 공유하기 위해 사용하는 온라인상의 콘텐츠)와 새로운 플랫폼에 가장 어울리는 진정성 있는 태도를 내세워 세계를 점령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콘텐츠가 플랫폼의 근간일 뿐 아니라 플랫폼이 종종 콘텐츠를 규정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빅히트엔터테인먼트(빅히트)의 위버스(Weverse)나 SM의 리슨(Lysn) 등 모두 같은 지향점을 갖고 출범한 플랫폼이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K-팝 아이돌 산업, 나아가서는 현대 음악 산업이 가지는 본질, 즉 ‘팬덤’(특정한 인물·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 또는 문화현상)이다. 이들은 단순히 음악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맹렬한 소비자인 동시에, 적극적인 참여자이고, 때로는 그 자체가 하나의 하위문화의 주체로 활약한다. 가령 BTS 현상은 ‘아미’의 존재 없이 설명할 수 없으며, 이 관계에 있어 아미는 단순히 서포터의 역할을 넘어서는 하나의 주체적인 존재로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소위 음악대중이라는 애매한 소비자가 사실상 종말을 고한 K-팝의 시대에서 팬들의 활동은 그 자체로 수익 모델이자 독점적인 콘텐츠의 기반이 되며, 앞으로 K-팝의 성패, 나아가 한국 대중음악 산업의 성패는 누가 어떤 방식으로 어떤 규모의 팬덤을 결집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K-팝의 성패는 당연히 플랫폼에 달려 있을 수밖에 없다.
팬덤 지지 발판으로 더 커진 K-팝 영향력
2021년 1월 27일, 빅히트와 네이버는 지분교환 방식으로 협력을 선포했다. 이로써 빅히트, 네이버, YG가 새로운 연합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빅히트가 가진 콘텐츠인 BTS와 이를 바탕으로 대세로 떠오른 플랫폼 위버스가 브이라이브라는 최대의 커뮤니티를 가진 네이버의 기술·운영 능력과 결합하겠다는 복안이다.
공교롭게도 그 이튿날, 온라인·모바일 게임의 선두주자인 엔씨소프트와 CJ ENM이 손을 잡고 K-팝 통합 플랫폼인 유니버스(UNIVERSE)를 출범시켰다. CJ의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와 디지털 플랫폼 노하우가 엔씨소프트의 정보기술(IT)과 결합되어 전 세계에 흩어진 팬덤을 아우르겠다는 의도다.
코로나19가 불러온 대유행 시대와 맞물려 콘텐츠만큼이나 온라인 플랫폼의 역할이 중요해진 만큼, 이 같은 산업은 앞으로도 강화될 것이다. 해외 대형 배급사, 유튜브 같은 외국 온라인 플랫폼의 의존도를 차츰 줄이고 있는 K-팝의 글로벌 지배력이 충성스러운 팬덤의 지지를 갈무리하며 향후 더 확대될 것으로 보이는 이유다.
김영대_ 음악평론가이자 문화연구자.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대학교에서 K-팝에 대한 연구로 음악학(Ethnomusicology)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