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의 변동과 외환 거래가 각국의 경제성장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외환정책은 한 국가의 생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지난 6월 28일 정부는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제9차 국민경제자문회의 겸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열어 2016년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을 발표했다.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같은 대외적인 불확실성이 확대되자 경제적 불안심리에 적극 대응하고 외환 건전성을 적극 관리하겠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또한 시장의 불안이 진정될 때까지 국내외 경제·금융 상황을 24시간 모니터링해서 적시성 있게 외환시장을 안정시키겠다고 밝혔다. 각국의 경제 문제가 거미줄처럼 연결된 글로벌 경제 환경에서 외환정책은 경제정책의 지렛대 역할을 한다. 그동안 경제 발전과 국제 경제 환경의 변화에 발 맞춰 수차례 변해온 우리나라 외환정책의 뿌리와 줄기를 살펴보자.
▶ 대외 개방도가 높은 우리나라는 외환정책이 중요한 이슈가 된다.
1946년 1월 제정된 군정법령 제39호 ‘대외무역규칙’은 우리나라 외국환 관리에 관한 법규의 효시이자 외환정책의 뿌리다. 외환정책은 환율정책과 외환제도에 관한 정책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두 정책은 긴밀하게 연동돼 있다. 환율정책이 환율제도의 선택과 외환시장의 안정적 운영에 관한 정책이라면, 외환제도에 관한 정책은 외환거래제도의 수립과 운영에 관련된다. 1948년 2월 도입된 외국환예치증제도, 1950년 6월 입법화된 외국환예치집중제도에서 초창기 외환정책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1961년 2월 채택된 외국환매각집중제도에 따라 제3공화국 정부는 부족한 외환을 확보하기 위해 외환 거래와 보유를 엄격히 통제했으며, 광복 이후부터 시행해오던 복수환율제도를 1964년 5월까지 유지했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자 정부는 수출 진흥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자연스럽게 수출업자의 외화 획득이 증가하자 새로운 외환정책이 필요하게 됐다. 따라서 1961년 12월 ‘외국환관리법’을 제정했으며 그때까지 외환제도를 규정하던 군정법령, 한국은행법, 재무부령 등을 흡수·통합했다. 또한 외환정책을 수립하던 한국은행의 업무를 정부로 이관하고, 일반 시중은행에서도 외국환 업무를 취급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지금 같은 외환 관리체제의 기틀이 마련됐다.
제1차 오일쇼크가 시작된 1970년대 전반에는 국제수지 적자가 크게 나타났고 경제성장에 필요한 외국 자본을 많이 도입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외환정책은 수출 촉진과 수입 억제를 바탕으로 외환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운영됐다. 1970년대 후반에는 세계적으로 무역 자유화 추세가 확산되고 우리나라의 국제수지 사정도 좋아져 수입 자유화 조치를 단계적으로 확대했다.
동시에 해외여행의 경비 지급 한도를 늘리는 등 외환 관리를 완화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또한 무역 규모가 확대되면서 자연스럽게 외국으로부터 시장 개방에 대한 압력이 커졌다. 대외적 요구에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경상 거래와 자본 거래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외환정책이 전개됐다.
▶은행 외환딜러룸 풍경.
외국인의 우리나라 주식 보유 비중 31.2%
민간의 자율결정권을 높이는 방향으로 꾸준히 자유화
1980년대는 우리나라의 무역 규모가 확대됐지만 동시에 시장 개방 압력도 더욱 거세졌다. 국제 정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정부는 1980년 2월 종전의 고정환율제도에서 주요국 통화 시세와 연동하는 복수 통화 ‘바스켓 페그(Basket Peg)’ 제도로 환율정책을 변경했다. 1981년에는 외국인의 간접 증권투자를 허용했고, 1984년 7월에는 코리아펀드(Korea Fund)를 설립해 국내 증권시장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1988년 11월에는 경상 지급에 대한 제한 철폐 등의 의무를 규정한 국제통화기금(IMF) 8조국(條國 : IMF 8조의 의무를 이행하기로 수락한 IMF 가맹국)이 됨으로써 경상 거래에서 외환 지급 제한을 철폐할 의무를 갖게 됐다. 1990년대 들어서 정부는 외환 자유화와 자본 자유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외환과 자본의 자유로운 거래를 보장하고 시장 기능을 활성화함으로써 대외 거래를 원활히 하고, 국제수지의 균형을 맞추고 통화 가치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1990년대에는 시장평균환율제도를 도입해 환율의 일일 변동 허용폭을 점차 확대해나갔다.
환율정책의 목표는 명목환율의 안정보다 경상수지를 균형적으로 달성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1997년 12월에 외환보유고가 부족해 외환위기를 겪었다. 외환보유고란 한 국가가 일정 시점에 가지고 있는 외환 채권의 총액인데, 외환보유고가 너무 많아도 걱정이고 너무 적어도 걱정이라는 말이 있다. 수출입 동향에 따라 외환보유고가 늘거나 주는데 주로 국제수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준비금의 기능을 한다. 그래서 보유고가 너무 많으면 환율 하락 같은 부작용이 생기고 너무 적으면 자칫 대외 채무를 갚지 못하는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걱정인 셈이다.
외환위기에 직면한 우리나라는 변동 제한폭을 완전 철폐해 자유변동환율제도로 이행하며 자본의 자유화가 급속히 진전되었다. 1999년 4월에는 기존의 ‘외국환관리법’을 대체한 ‘외국환거래법’이 시행되었다. 이로써 외환 거래에 있어서 사전규제보다 사후보고와 건전성 감독 같은 사후관리를 중시하는 외환정책 체계가 구축되었다.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이후 여러 국가들과 통화스와프의 체결이 늘어났다. 통화스와프(currency swaps)는 원래 금융 시장에서 거래되는 파생상품의 하나지만, 국가 간 통화의 맞교환이라는 뜻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우리 경제는 2001년 8월 한국은행이 IMF 차입금을 전액 상환하면서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를 조기 졸업했다. 1999~2000년에는 세계의 경제 여건이 좋아져 우리 경제도 활력을 되찾았지만, 2001년에는 세계 경제가 둔화돼 두 번째 침체를 맞았다. 2010년 말에는 외국인이 우리나라 주식을 보유한 비중이 31.2%나 됐다.
우리나라 금융시장은 외국의 자본 유출입이 빈번한 구조였다. 2010년 미국과 중국 간의 환율 갈등이 글로벌 환율전쟁으로 확산됐듯, 전 세계에서 환율전쟁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이에 2016년 5월 G7 정상들이 정상회의를 끝내면서 정상선언을 채택하고,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은 내수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쓰고, 환율 조절을 목적으로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시장의 무질서와 변동성을 확대할 수 있는 ‘경쟁적인 통화절하’는 각국이 지양하기로 합의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나라의 외환정책은 경제 규모와 대외 개방 확대, 금융·외환시장의 양적·질적 발전 등에 따라 시장 원리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브렉시트 이후 우리나라의 외환정책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외 개방도가 높은 우리나라는 금융시장은 물론 실물경제 측면에서도 브렉시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외환정책은 민간의 자율결정권을 높이는 방향으로 꾸준히 자유화돼왔다. 정책 관련자들은 앞으로 주요 20개국(G20), 한·중·일, 국제금융기구와의 공조체제를 강화해 시장의 불안심리를 적극 차단하는 동시에 국제적인 대응력을 높여나갔으면 한다.
글 ·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전 한국PR학회 회장) 2016.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