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 12일 한국 스포츠계에 큰 소식이 전해졌다. 대한체육회가 출범한 지 105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인 김나미(54) 전 국제바이애슬론연맹 부회장이 사무총장에 선임된 것이다. 이로부터 9일 뒤인 3월 21일 이번엔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세계 스포츠 대통령’으로 불리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새 위원장에 짐바브웨의 커스티 코번트리가 선출됐다.
코번트리의 당선은 그야말로 ‘쇼킹’했다. 1894년에 창설된 IOC는 ‘나이 많은 백인 남자 귀족’의 아성이라 할 만큼 보수 색채가 짙기 때문이다. 코번트리는 IOC 131년 사상 최초의 여성 위원장이란 점에서 신기원을 열었다. 마흔네 살에 아프리카 출신 최초로 IOC 수장에 오르는 새 역사를 동시에 썼다. ‘로이터’ 통신은 “올림픽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코번트리도 자신의 당선을 두고 “세계가 진정으로 글로벌화하고 있으며 다양성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음을 보여준다”면서 “앞으로 8년 동안 그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위기의 올림픽… ‘변화’ 향한 갈망 터진 것
세계적인 수영선수 출신인 코번트리는 올림픽 메달만 7개(금 2개, 은 4개, 동 1개)로 화려한 이력을 자랑한다. 2004 아테네올림픽과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여자 배영 200m를 2연속 제패했다. 2012 런던올림픽 기간에 IOC 선수위원으로 당선돼 체육행정가로 투신했고 2023년에는 IOC 집행위원에 올랐다.
그는 일찌감치 12년간 재임한 토마스 바흐(독일) IOC 위원장의 ‘후계자’로 낙점됐지만 당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선거에는 총 7명의 후보가 출마해 역대 최다를 기록했는데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의 아들인 사마란치 주니어(스페인) IOC 부위원장과 육상 스타 출신인 세바스찬 코(영국) 국제육상경기연맹 회장 등 쟁쟁한 인물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번트리는 예상을 보기 좋게 깨버렸다. 제144차 IOC 총회에서 1차 투표에서만 전체 97표 가운데 과반인 49표를 얻어 6명의 남성 후보를 압도적으로 제치고 당선된 것이다.
대이변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겸손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빼어난 소통 능력을 갖췄다는 점이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IOC 위원들 사이에 넓게 퍼진 ‘혁신과 변화에 대한 갈망’으로 분석된다. IOC 사정에 정통한 전문가가 필자에게 전한 분석은 이렇다.
“IOC 위원들은 올림픽의 위상과 인기가 예전만 같지 않다는 위기감을 오래전부터 공유하고 있었다. 스포츠클라이밍, 스케이트보드 등 청년들이 좋아하는 종목들을 채택하는 등 대책을 마련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앞으로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IOC의 역할, 성평등, 다양성, 새로운 시장 개척 등 여러 이슈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코번트리의 당선은 이젠 정말로 바뀌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강하게 형성되면서 이뤄진 것이다.”
유승민 회장과 인연, 전북올림픽 유치에 호재?
우리의 관심은 ‘코번트리 위원장의 당선이 한국 스포츠에 유리할 것인가’이다. 국내 체육계의 반응은 대부분 긍정적이다. 무엇보다 신임 유승민 대한체육회장과 가까운 사이라는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된다. 1982년생인 유 회장과 1983년생인 코번트리 위원장은 2004년 아테네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공통점이 있고 2016년부터 4년간 IOC 선수위원으로 함께 활동했다. 전북이 도전장을 낸 2036년 하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이 코번트리 위원장이 주도하는 IOC 총회에서 투표로 결정되는 만큼 둘의 우호적인 관계가 국내 올림픽 유치에 힘을 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전북의 대응도 빨라지고 있다. ‘IOC 첫 여성 위원장’이라는 코번트리의 상징성을 활용, 기존의 전략을 발전시킨다는 구상이다. 전북은 코번트리가 추구하는 올림픽 철학을 다변성, 저비용·고효율, 지속가능성, 친환경, 선수 역량 강화, 여성 스포츠 보호 등으로 분석했다. 현재 2036 하계올림픽 유치전에 뛰어든 나라는 인도(아마다바드)와 카타르(도하), 인도네시아(누산타라), 튀르키예(이스탄불), 칠레(산티아고), 헝가리(부다페스트) 등 10개국이 넘는다. 이 중 인도와 카타르가 강력한 후보로 꼽힌다. 특히 대륙별 순환 개최 관례에 따라 2036 올림픽은 아시아에서 열릴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는 인도, 카타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성 인권 감수성에서 강점이 있다는 평가가 따른다.
무엇보다 개최지 선정 시기와 방법이 중요하다. 과거엔 개최 후보 도시 3~5개 정도를 추린 뒤 전체 IOC 위원들의 투표로 개최지를 선정했다. 현재는 ‘미래유치위원회’가 후보 도시를 우선협상도시로 선정한 뒤 총회에서 승인하는 방식이다. 만약 코번트리가 현재의 방식을 유지한다면? 개최지 선정 절차가 적어도 2년은 앞당겨지게 된다. 우리의 빠른 대처가 필요한 순간이다.
권종오 SBS 기자
1991년 SBS에 입사해 30년 넘게 축구, 야구, 농구, 골프 등 모든 종목의 스포츠 경기 현장을 누볐다. SBS 유튜브 채널인 ‘스포츠머그’에서 ‘별별스포츠’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