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바라본 펀치볼 마을. 여의도 면적의 6배 정도되는 해발 500m의 분지 주변을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이 에워싸고 있다.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가 싸운다. 전쟁이다. 목숨을 걸고 싸운다. 지키려는 자는 위에 있고, 빼앗으려는 자는 아래에 있다. 지키려는 자는 내려다보고 있고, 빼앗으려는 자는 올려다 본다. 당연히 위에 있는 지키려는 자가 싸움에 유리하다. 하지만 현실은 지키려는 자가 꼭 이기지 않는다. 고지(高地)를 두고 벌인 전투는 참혹하다. “고지를 탈환하라” “고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에 수많은 젊은이가 방아쇠를 당기고, 육박전을 벌이고, 그렇게 죽어갔다. 모두 누구의 귀한 아들이고, 남편이고, 아버지였다. 죽는 순간, 그들은 자신의 죽음이 의미 있다고 여기며, 가쁜 마지막 숨을 내쉬었을까? 그들이 숨진 자리에 훗날 세워진 위령비는 얼마나 그들의 지치고 아픈 영혼을 위로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펀치볼’이라는 지명은 우리의 아픔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미군을 따라 한국에 온 종군기자가 산에 둘러싸여 있고, 가운데가 푹 꺼진 지형의 모습이 화채 그릇(Punchbowl) 같다고 해서 붙인 별명이다. 특이한 지형이다. 세계 3대 분지라고 한다. 큰 운석이 떨어져 생겼다는 ‘설’도 있지만, 실제로 침식이 잘되는 땅이 산에 둘러싸여 생긴 분지다.
펀치볼의 정식 명칭은 강원도 양구의 해안면이다. 양구의 31번 국도를 따라 해안면으로 가려면 ‘돌산령터널’을 통과한다. 터널을 지나자마자 전설 속의 별천지를 한눈에 보게 된다. 험한 산악 지역 한가운데 여의도 면적의 6배에 가까운 커다란 평원이 거짓말처럼 자리 잡고 있다. 가장자리가 뾰족뾰족한 모양의 유리로 만든 화채 그릇 같다. 6·25전쟁 당시 이곳을 놓고 벌어진 치열한 전투 과정에서 찢어진 살점과 피가 흘러내려 고였을 것 같은 험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펀치볼 마을에 있는 전투전적비
여의도 면적 6배에 달하는 커다란 평원
이 분지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병력과 물자의 집결이 가능했고, 둘러싼 봉우리들은 양구를 거쳐 인제를 관통하거나, 북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남북한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반드시 이 땅을 차지해야만 했다. 당시 얼마나 치열한 전투를 했는지 잠시 그때로 돌아가보자.
1950년 9월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한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말에는 압록강 유역까지 진격했다. 파죽지세였다. 하지만 중국군이 개입하자 전세는 역전됐고, 서울이 다시 북한군에게 점령됐다. 전열을 정비한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해 서울을 탈환했고, 다음해 5월 무렵에는 현재의 휴전선 부근에서 전선이 교착됐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결렬됐다.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 총사령관은 군사력으로 압박하고, 협상을 강요하는 전략을 세웠다. 미군 해병 1사단과 국군 해병 1연대는 당시 북한군이 차지하고 있던 해안분지 북쪽의 1026고지, 924고지를 빼앗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국군은 1026고지를 ‘모택동 고지’로, 924고지를 ‘김일성 고지’로 이름을 붙이고 전투 의지를 높였다. 약 3주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북한군은 물러났다. 북한군 사살 3739명, 포로 767명, 아군 전사 506명, 부상 1602명, 실종 11명으로 기록되었다. 북한군은 고지도 빼앗기고, 전사자도 일곱 배 많으니 완패한 셈이다. 펀치볼 전적비에는 “임들의 몸이 방패가 되어 우리 민족을 살렸고, 임들의 흘리신 피는 조국애의 일편단심으로 이 나라를 건졌도다”라고 전사자들의 영령을 위로한다. 밤낮으로 주인이 바뀌는 고지전의 주 무대였다.
▶높이 6m의 푸른색 알몸 조형물인 그리팅맨이 고개를 숙여 평화를 기원하는 인사를 하고 있다.
전투의 역사 현장에 선 ‘인사하는 사람’
애초 이곳 분지는 습기가 많아 산속이지만 해안(海岸)이라는 지명이었으나, 뱀이 많은 것을 보고 조선시대 한 스님이 뱀의 천적인 돼지를 키우면 마을에 편안함이 찾아온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스님 말대로 돼지를 키웠더니 뱀이 사라졌고, 마을 이름도 돼지 해(亥), 편안 안(安)으로 바뀌었다. 해안면 분지는 남북 길이 11.95㎞, 동서 6.6㎞, 둘레 33㎞에 이른다. 6개의 행정동으로 구분돼 있지만, 면 전체가 외부와 고립된 지형이어서 1200여 명의 주민이 서로 알고 지낸다.
마을 한쪽에 자리 잡은 전쟁기념관의 앞뜰엔 높이 6m의 남성이 알몸으로 북쪽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큰 조형물이 있다. 생뚱맞기도 하다. 그리팅맨(Greeting Man), 인사하는 사람이다. 전투의 역사 현장에 벌거벗고 인사하는 조형물이라니.
이 조형물을 만들어 기증한 유영호(56) 작가의 고향은 양구다.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유학한 작가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등 여러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낯선 사람이 길거리에서 만나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고, 관계를 시작하는 것에 착안해 그리팅맨을 만들었다고 한다.
고개를 15도 숙인 모습으로 본인의 자존감을 지키면서 상대방도 존중하는 자세를 표현했다. 작가는 이런 모습의 조형물을 2012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 처음 설치한 이후 국내와 세계 곳곳에 그리팅맨을 세웠다. 고려청자를 닮은 푸른색은 인종을 초월한 중립적인 색으로 전 인류를 의미한다. 동족상잔의 비극 현장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적대 관계에서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언젠가는 그 간절함이 이뤄지리라.
▶심한 일교차와 분지를 휘돌아 부는 바람 탓에 시래기는 펀치볼의 대표 특산물이 됐다.
권익위 주민들 숙원사업인 땅 소유권 획득 적극 지원
펀치볼의 특산물은 시래기다. 시래기는 무의 이파리다. 다 자라란 무를 뽑아 잎을 잘라 햇볕에 말린 것이다. 2007년부터 지역 대표 농·특산물로 키우기 시작해 지금은 전국 명품 브랜드가 됐다. 주민들의 주된 수입원이다. 이전에 주인공이었던 무는 버려지고, 버려졌던 무청은 주인공이 돼 귀한 대접을 받는다.
펀치볼 시래기가 유명한 것은 생산지가 해발 500m 이상의 고산분지로 겨울철엔 20도 이상의 일교차를 보이고, 바람이 불면 분지 안에서 맴돌아 시래기를 말리는 데 매우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의 시래기보다 맛과 향이 좋고 식감이 부드럽다고 한다. 비타민 B·C와 미네랄, 철분, 칼슘, 식이섬유 등이 풍부하고, 혈압과 당뇨, 비만 등에 좋다고 알려져 겨울철 웰빙 먹거리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껍질이 부드러운 시래기를 만들기 위해 품종을 개량해 먹을 때 시래기 껍질을 베끼지 않아도 된다.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사과와 인삼도 펀치볼의 특산물이라고 한다.
주민들의 숙원사업이 있다. 땅의 소유권을 획득하는 것이다. 애초 전쟁 전 북한의 땅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많은 주민이 북한 쪽으로 넘어가 땅 주인이 사라졌다. 주인이 없는 무주지(無主地)가 됐다. 이승만·박정희정권은 1956년과 1972년 두 차례 해안면에 정책 이주로 재건촌을 만들었다. 당시 ‘10년간 경작하면 소유권을 준다’는 구두 약속을 했고, 260세대, 총 1394명이 해안면에 정착했다. 각 세대에 5000평 정도의 땅을 나눠줬다.
하지만 도중에 남한에 있던 원 소유자가 나타나 재판을 해 일부 소유권을 찾아갔고, 정착민들은 산기슭을 개간해 농사를 지었다. 10년이 지나면 소유권을 준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토지 소유자가 북한에 있어 민법상 무주지로 보기 어렵고, 전쟁 중 등기부와 지적공부가 사라져 권리 관계 증명이 쉽지 않다는 이유였다.
▶한국정부의 펀치볼 무주지 문제 해결 노력을 다룬 1월 12일자 <뉴욕타임스> 본판 기사
권익위 등 범정부 특별팀 꾸려 구제 나서
1982년부터 정부가 수복 지역에 대한 특별법으로 구제에 나섰으나 보증인 등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일부 경작권만 받았다. 주민들은 국민권익위원회(위원장 전현희)에 민원을 제기했고, 2018년 12월에 기획재정부와 행정안전부, 국방부, 한국자산관리공사 등 10개의 부처와 공공기관이 참여한 범정부 특별팀이 꾸려졌다.
이후 국민권익위는 지난 3년 간 수십 차례 현장과 관련 기관을 방문해 설득하는 등 조정권한을 적극 활용해 특별조치법 등의 제·개정과 해안면 개발지원 등을 이끌어냈다. 그 결과 해안면 무주지 거주민들은 약속했던 토지를 받을 수 있게 됐고 향후 낙후된 해안면의 실질적 개발지원은 물론 체계적인 토지관리도 가능하게 됐다.
한기택(70) 무주토지대책위원회 위원장은 1956년 당시 5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이곳으로 이사 와서 농사지으며 한평생을 살았다. “당시 허허벌판이었어요. 군인들이 초가집 한 채씩 이주민들에게 지어줬고, 인근 지역에 볼일이 있다고 하면 군 트럭에 태워 데려다 주기도 했어요”라고 회상했다. 한 위원장은 계속 이어 말했다. “대부분의 땅에 돌과 나무가 많아 개간하는 데 오랜 시일이 걸렸습니다. 지역 주민의 평균 연령이 72세입니다. 더 늙어 죽기 전에 소원을 풀어주고 싶습니다.” 현재 국가에 얼마의 돈을 주면 땅의 소유권을 가질 수 있는지 막판 협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시간은 흐르고, 인간은 사라지지만, 땅은 항상 그 자리다.
이길우_ <한겨레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해 34년간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한민족과 이 땅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한민족의 무예, 공예, 민간신앙 등을 글과 사진을 통해 꾸준히 발굴·소개한다. 저서로 <고수들은 건강하다>, 사진집 <신과 영혼의 몸짓 아첼레란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