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속초항의 전경. 아바이마을은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다.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서울 유입인구가 많아지며 ‘서울시 속초구’로 불린다.
쇠갈고리를 쇠밧줄에 건다. 쇠밧줄에 걸린 갈고리를 힘차게 잡고 갑판을 걷는다. 그 힘으로 배가 움직인다. 동력이 없는 멍텅구리 배. 쇠밧줄은 아바이마을과 속초시를 이어준다. 바로 눈앞의 거리지만 갯배가 없으면 멀리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아바이마을의 실향민들에겐 갯배가 삶의 대동맥이다.
갯배는 물가(갯가)를 오가는 배다. 뱃삯은 500원. 아바이마을이 속한 속초시 청호동과 중앙동을 연결한다. 갯배는 속초 시내와 아바이마을 사이에 놓인 속초항 수로를 건너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배를 통과하는 쇠밧줄을 양쪽 갯가에 걸어놓고 갈고리를 철선에 걸어 당기며 오갔다. 노약자를 제외한 승선자가 갈고리로 배를 끈다. 6·25전쟁이 끝난 1955년 이 갯배가 등장했다.
▶6·25전쟁 후 함경도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속초항 모래사장에 지은 아바이마을 당시 모습
한국의 유일한 실향민 집단 거주촌
아바이마을은 한국에서 유일한 실향민 집단 거주촌이다. 주로 함경도 출신 실향민이 많이 살았다. ‘아바이’는 나이 많은 남성을 가리키는 함경도 사투리. 6·25전쟁 중 이북에서 피란 온 실향민들은 잠시 기다리면 고향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속초 모래사장에 임시로 마을을 만들었다. 모래사장이라 집을 짓기도 쉽지 않았다. 식수 확보도 어려웠다.
같은 고향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서 신포마을, 정평마을, 홍원마을, 단천마을, 앵고치마을 등 고향 이름을 딴 집단촌을 이뤘다. 며칠 있으면 고향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반세기도 훨씬 넘는 긴 세월을 지냈다. 남북관계가 좋아지거나, 나빠질 때면 아바이마을 이산가족의 아픔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언론을 통해 전국에 보도됐다. 아바이마을은 분단과 통일을 염원하는 상징적 공간이 됐다. 아바이마을의 갯배는 실향민의 아픔을 담고 수로를 건넌다. 많은 시인이 갯배의 서정을 시로 풀어냈다. 유형일 시인의 ‘갯배’는 나루터에 시비로 새겨져 있다. 그 절절한 시어를 맛보자.
▶유형일 시인의 '갯배'
▶아바이마을 앞 모래사장에 세워진 아바이 동상. 한 손은 북쪽 고향을 가리키고 있다.
▶속초시와 아바이마을을 연결하는 갯배 부둣가 전경
고향을 그리며 갯배에 몸을 실어
오늘도 끊어지지 않는 쇠줄에 쇠고리를 걸으며 아바이마을의 실향민들은 고향을 그리면서 갯배에 몸을 싣는다. 갯배 선착장엔 속초시를 다녀오는 청호동 주민들이 갯배를 기다린다. 평소 같으면 와글와글 모여서 음식물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울 관광객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코로나19 탓이다. 20년 전 인기 드라마 <가을동화> 촬영지로 대중의 시선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주인공 송승헌과 송혜교는 갯배를 배경으로 슬픈 사랑을 이야기했다.
10년 전에는 예능 프로그램 <1박2일>에 아바이마을의 먹거리가 소개되며 속초 관광의 필수 코스가 됐다. 갯배를 타고 속초 시내에서 아바이마을로 건넌다. 쇠고리의 차가운 감촉이 선뜩했다. 그동안 이곳 실향민의 아픔은 뒷전이었다. 남북관계는 춤을 추었고, 고향은 가까이 왔다가 멀어지곤 했다.
갯배에서 내린 이방인들은 ‘아바이순대’와 ‘오징어순대’의 환영을 받는다. 원래 함경도 음식인데 실향민을 통해 속초의 대표 향토음식이 됐다. 함경도에서는 마을 잔치나 경사 때면 돼지를 잡고, 돼지 대창에 무청 시래기, 돼지고기 잘게 썬 것, 선지, 마늘, 된장 등을 버무려 채웠다. 보통 순대보다 2~3배 크다.
함경도 해안지방에서는 돼지 내장이 귀해, 명태가 많이 나는 겨울에는 돼지 대창 대신 명태의 곳에 소를 채워 만든 명태순대를 제사상에 올렸다. 여름에는 구하기 쉬운 오징어로 순대를 만들었다. 오징어순대는 선지 대신 각종 채소가 푸짐하게 들어 있어 오징어의 쫄깃한 식감과 채소의 담백한 맛이 잘 어우러졌다.
아바이마을은 온통 식당이다. ‘원조…’ ‘3대에 걸친…’ 등 관광객의 발길을 잡기 위한 요란한 간판이 즐비하다. 고즈넉한 옛 골목길을 기대한 이방인들에겐 실망스럽다.
과거 아바이마을은 실향민들이 임시 거처로 나무판자를 이어 얼기설기 지은, 판잣집이 모인 판자촌이었다. 판잣집의 귀퉁이에는 어김없이 화분이 놓여 있었다. 통조림 깡통이나 수산물을 담았던 나무 상자에 흙을 다져 넣고, 고추며 화초들을 심어놓았다. 귀향의 꿈을 품고 살아가던 주민들은 화분을 키우며 희망을 이어갔다.
▶아바이마을에는 아바이순대 등을 파는 음식점이 많다.
▶아바이마을 청호노인회 김진국 회장이 명태 덕장에서 피란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통일의 그날이 언제일까?
오징어순대를 안주로 막걸리를 한잔 마시고, 식당 골목을 지나면 바닷가다. 넓은 모래사장과 탁 트인 바다가 막힌 가슴을 확 뚫어준다. 모래사장 초입에 있는 ‘아바이 동상’이 애절하다. 후줄근한 바지와 양복, 주름진 얼굴은 인자하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감추고, 자식들을 위해 희생해온 아버지다. 왼손은 지팡이를 짚었는데, 오른손은 북쪽을 가리키고 있다. 차마 얼굴은 북쪽을 향하지 않았지만, 한 손은 북쪽을 바라본다. 무심한 흰 구름이 아바이 동상의 배경을 스쳐간다. 이곳 아바이들은 평생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살았다. 기다리던 통일의 소식은 들리지 않고, 하나둘 이승과 이별했다. 한때 7000여 명에 이르던 아바이마을의 실향민 1세대는 이제 100여 명뿐이다.
청호노인회 김진국(81) 회장은 12세 때 고향인 함경도 북청면 양하면에 살다가 6·25전쟁을 겪었다. 목선을 타고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던 부모님은 전쟁이 일어나자 그 배에 가족을 태우고 월남해 부산에서 3년 살다가 아바이마을로 옮겼다. 부산 피란살이는 힘들었다. 길거리에서 구걸도 했다. 함경도 출신 실향민이 속초에 집단 거주촌을 형성한다는 소문을 듣고 아바이마을로 이사했다.
전쟁 통엔 속초에 주둔하는 미군이 버린 음식물을 뒤져 허기를 해결하기도 했다. 속초 앞바다엔 오징어와 명태 등 생선이 풍부해 곧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김 회장은 속초시 시의원도 하며 아바이마을을 위해 봉사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이제는 친구들도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속초시 함경남도 도민회 김만영(60) 회장은 15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김지용)의 유언을 늘 가슴에 품고 있다. 함경남도 영흥군이 고향이었던 아버지는 살아생전 아바이마을을 지키면서 살았다. 철도역장까지 했던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지금 고향에 살고 있을 네 형을 잊지 말라”고 부탁했다. 급하게 월남하면서 두고 온 큰아들이 평생 마음의 짐이 됐다. 김씨는 “형님이 아직도 고향에 살아 계시다고 믿는다”며 “통일의 그날, 형님에게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그대로 전해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날이 언제일까?
이길우_ <한겨레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해 34년간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한민족과 이 땅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한민족의 무예, 공예, 민간신앙 등을 글과 사진을 통해 꾸준히 발굴, 소개한다. 저서로 <고수들은 건강하다>, 사진집 <신과 영혼의 몸짓 아첼레란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