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수목원에서 바라본 석양. 앞에 보이는 낭새섬은 민병갈 설립자가 구입한 무인도다.│천리포수목원
▶천리포수목원의 정원
▶천리포수목원 안에 있는 민병갈 설립자 흉상
“제발 제 땅을 사주세요. 딸을 결혼시켜야 하는데 돈이 필요해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더위를 피해 가끔 놀러 온 서해안 천리포 바닷가였다. 조금 알고 지내던 마을 노인이 갑자기 땅을 사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한국엔 잠시 거주했다가 돌아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노인의 부탁이 너무 간절했다. 결국 아무런 연고도 없는 충남 태안 천리포 바닷가의 야산 6000여 평을 샀다. 곧 소문이 퍼졌다. 동네 주민들이 앞다퉈 자신의 땅도 사라고 졸랐다. 그때가 지금부터 58년 전인 1962년께. 미국 해군 중위 출신의 칼 밀러(1921~2002)가 미국인으로는 1호로 한국에 귀화하고, 평생 한국에 살면서 천리포수목원을 가꾸게 된 ‘우연한 사건’이다.
▶큰별 목련 ‘라즈베리 펀’
그가 가꾼 천리포수목원은 한국 최초의 민간 수목원이다. 2000년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세계에서는 12번째,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에 선정됐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고아 네 명을 입양해 키웠다. 그리고 “한국의 나무와 결혼했다”고 말했다. “내가 죽으면 무덤을 쓰지 말고, 그 자리에 나무 한 그루라도 더 심으라”는 유언도 남겼다. 그의 한국 이름은 민병갈. 별명은 ‘파란 눈의 나무 할아버지’다.
▶중뿔남천 ‘라운드 우드’
▶남천 ‘움프쿠아 치프’
파란 눈의 나무 할아버지 ‘민병갈’
한 해를 마무리하며 서해 바닷가 천리포수목원에 가서 조용히 지는 해를 바라본다. 잔잔한 바닷물 너머로 서서히 해가 떨어진다. 황금빛 석양은 찰랑거리는 물결 위에 찬란하게 흩어진다. 수목원의 울창한 나무를 배경으로 의자에 앉아 침묵에 잠긴다. 코로나19로 힘들었던 한 해의 어지러운 기억의 조각들이 서서히 의식의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수목원을 가꾼 민 설립자의 굵은 땀방울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문득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이 땅에 수목원을 남기고 간 그가 궁금해진다. 무엇이 그를 이역만리 한국 땅에 붙잡아 놓고, 평생 독신으로 나무만 사랑하게 만들었을까?
▶측백나무 ‘산데리’
192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독일계 이민가정에서 2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해군 정보학교에서 일본어 과정을 이수하고, 1945년 6월 일본 오키나와에 배치돼 일본군 포로와 일본군 위안부를 직접 신문했다. 광복과 함께 38선 이남을 관할한 미군정청에 부임했다. 한국과는 첫 만남이다. 1년 만에 제대하고 귀국했으나, 자꾸 한국에 끌렸다. 제대를 하고 전쟁이 끝난 한국에 와서 1954년 한국은행 총재고문으로 취업했다. 그는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자를 친아버지처럼 따랐다. 유일한의 권유로 가진 돈을 몽땅 유한양행 주식에 투자해 목돈을 모았고, 이를 종잣돈 삼아 주식투자를 해서 큰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그는 천리포 주변의 땅을 샀다.
한국은행 민병도 총재와는 형제처럼 지냈다. 당시 직장 상사인 그와 얼마나 친했던지, 그의 성과 돌림자에 자신의 이름 ‘칼’과 비슷한 발음인 ‘갈’을 합쳐 ‘민병갈’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었다. 귀화도 했다.
▶아기동백 ‘오톰 선’
▶무늬팔손이
목련 800여 종 등 1만 6000여 종 서식
1970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수목원을 만드는 공사를 시작했다. 금요일 오후에 천리포로 내려와 월요일 새벽 서울로 출근할 때까지 나무를 심고 숲을 가꾸었다. 조금씩 사기 시작한 땅이 모두 58만㎡(19만여 평)가 됐다. 그는 수목원 구석구석을 직접 삽과 호미질을 하며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를 정성 들여 심었다. 땅을 조금만 파도 염분 섞인 흙이 나오거나 고운 모래인 척박한 토양이었다. <식물도감>을 뒤져 나무와 풀의 학명을 모두 외웠다. 매년 미국의 나무 경매장에 가서 묘목과 종자를 사들였다. 매일매일 날씨를 비롯한 모든 수목원의 일을 상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인공적으로 숲을 가꾸는 것을 싫어했다. 자식처럼 키운 나무에 상처를 줄 수 없다며 가지를 가위로 잘라 보기 좋게 다듬는 것을 금지했다. 직원들은 “나무를 지켜만 주고, 결코 주인 노릇을 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농약과 기계도 쓰지 못하게 했다.
▶민병갈 설립자 기념관
1978년 민병갈은 남해안 답사여행에서 감탕나무와 호랑가시나무의 자연교잡으로 생긴 신종 식물을 발견했다. 세계에서 한국의 완도에서만 자라는 희귀종이었다. 국제학회에 한국 이름 ‘완도호랑가시’로 등록됐다.
천리포수목원에는 목련 865 분류군, 호랑가시나무 548 분류군, 동백나무 1044 분류군, 무궁화 342 분류군, 단풍나무 251 분류군 등 모두 1만 6859 분류군의 식물이 있다. 종수로는 국내에서 가장 많다. <대한식물도감>의 저자인 고 이창복 서울대 교수는 생전에 “민 설립자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까다로운 식물 라틴어 학명을 수천 개 기억하고, 한국 자생식물의 토속 이름까지 줄줄 외우는 놀라운 기억력을 지녔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1996년에는 어머니 에드냐가 101세로 세상을 떠나자, 천리포 자신의 숙소 앞에 어머니가 좋아했던 목련 라즈베리 펀을 심고 아침마다 쳐다보며 “굿모닝 맘”이라고 문안 인사를 했다.
▶천리포수목원 정원
▶천리포수목원은 바로 해변가에 있다.
“300년 뒤를 보고 수목원 사업을 시작했다”
민 설립자는 2002년 4월 8일, 81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묘를 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유족과 천리포수목원 직원들은 완도 호랑가시나무 옆에 무덤을 만들었다. 10주기인 2012년 유골을 수습해 고인이 아끼던 태산목(목련과 나무의 한 종류) 아래 수목장으로 안치했다. 마침내 그가 원하던 대로, 죽어서도 한 뼘의 땅도 차지하지 않고 온전히 나무에게 양보한 것이다.
현재의 김용식 천리포수목원장은 민 설립자와 첫 만남이 지금도 생생하다. 군복무 중 신문에서 천리포수목원과 민 설립자의 이야기를 읽고 감동받은 당시 이등병이었던 김 원장은 천리포수목원에 편지를 보냈다. 전북대 임학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기회가 되면 천리포수목원에서 경험을 쌓고 싶다고 전했다. 얼마 뒤 답장이 왔다. 민 설립자가 만나보고 싶다며 천리포수목원이 아닌 서울 한국은행 본점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첫 휴가 때 군복을 다려 입고 한국은행에 가서 민 설립자와 처음 만났다. 민 설립자는 젊은이의 열의에 마음이 끌려 시간 나는 대로 수목원에 오라고 했다. 김 원장은 휴가 때와 제대 후 복학 전에 천리포수목원의 첫 인턴 학생으로 실무를 익혔다. “당시 이면지에 민 설립자는 깨알 같은 글씨로 회사 이름과 숫자를 써놓곤 했어요. 나중에 보니 그것이 당시 주식투자 관련 메모였어요.” 영남대학교 생명응용과학대학에 교수로 34년간 재직하고 2017년 정년퇴직한 김 원장은 3년 전부터 수목원장을 맡고 있다.
▶김용식 천리포수목원장
천리포수목원은 2009년 이전에는 사전 허락을 받은 식물 연구자나 후원 회원만 들어올 수 있는 ‘금단의 비밀정원’이었다. 그러나 2007년 12월 기름유출 사고로 피해를 본 태안 지역경제에 도움을 주고 일반인에게도 자연과 식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기 위해 2009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했다. 민 설립자가 사용했던 집무실은 민병갈기념관으로 바꾸었고, 그와 직원들이 거처로 썼던 기와집은 방문객을 위한 숙소로 사용된다. 천리포수목원은 특히 단풍나무, 호랑가시나무, 동백나무, 목련, 무궁화 등 5종을 집중적으로 수집해 키운다. 목련은 대개 3월이나 4월 새하얀 꽃을 피웠다가 지지만, 다양한 목련 품종을 보유한 천리포수목원에서는 가을까지도 목련을 볼 수 있다.
민 설립자는 생전에 “300년 뒤를 보고 수목원 사업을 시작했다”며 “나의 미완성 사업이 내가 죽은 뒤에도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서해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비릿하면서도 향기롭다.
이길우_ <한겨레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해 34년간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한민족과 이 땅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한민족의 무예, 공예, 민간신앙 등을 글과 사진을 통해 꾸준히 발굴, 소개한다. 저서로 <고수들은 건강하다>, 사진집 <신과 영혼의 몸짓 아첼레란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