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세상은 늘 변증법적으로 교유(交遊)한다. 영화는 세상에서 소재를 찾고 그걸 묘사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뛰어넘는다. 세상 역시 영화를 통해 신선한 자극을 받는다. 그와 동시에 종종 영화 이상의 드라마틱한 현실을 만들어낸다. 예컨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두 정상의 백두산 깜짝 등반 같은 것. 또는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능라도 5·1 경기장 연설 같은 것. 지난 70년간 한국에서 또는 북한에서 이런 장면이 영화로 그려진 적이 있었던가. 영화보다 더 극적인 세상의 드라마는 많은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고 때론 어떤 이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들이 불편한 것은 정작 영화적 상상력의 부재 때문일 수 있다. 영화로 세상을 들여다본 경험이 별로 없는 사람들일수록 변화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법이다.
이제 남한 땅에 자주 ‘출몰’하게 될 북한 영화가 한동안 그런 ‘오해’와 ‘우려’의 시선을 받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요즘 들어 알게 모르게, 북한 영화는 우리 관객들에게 적잖이 소개되고 있다. 뜨거운 사회적 논란까지 이어지지 않아서일 뿐 영화계에서는 점점 더 많은 북한 영화를 소개할 계획을 마련해놓고 있다. 이건 곧 세상이 영화를 바꾸는 경우에 해당한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스타트 끊어
일단 테이프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끊었다. 부천영화제는 SF, 공포, 미스터리, 액션, 멜로 등 장르영화를 소개하는 영화제 가운데서도 가장 대중적인 성격의 필름 페스티벌이다. 그런 부천영화제가 북한 영화를 무려 아홉 편이나 튼 데에는 명백히 4·27 남북정상회담의 영향이 컸다. ‘괴물’, ‘26년’ 등 주로 사회물을 만들었던 제작자 출신의 영화제 위원장(최용배)이 시대 변화에 민감하게 적응한 면도 부천이 이들 영화를 가장 앞장서서 소개하게 된 계기가 됐다.
총 아홉 편의 영화 가운데 애니메이션 ‘교통질서를 잘 지키자요’ 등 여섯 편은 단편 작품이다. 주목을 끌었던 것은 세 편의 장편이었으며 이들 면면을 보면 영화제가 작품 선정에 얼마나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일단 신상옥 감독이 북한 체류 시절(1978~1986) 만들었던 여덟 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부천스러운’ 영화 ‘불가사리’를 선택한 것이 눈에 띈다.
‘불가사리’는 조선시대 민중의 한을 괴수 불가사리를 통해 풀어낸다는 내용의, 일종의 정치 우화로 신 감독이 북한 탈출 직전인 1985년에 만든 것이다. 북한 체제에 대한 선전 선동 문구를 아예 드러내지 않을 수 있으면서도 사극의 서사(敍事) 구조를 이용해 보편적인 역사의식을 보여줌으로써 이념적으로 다소 자유로울 수 있었던 작품이다. 당시의 북한에서나 지금의 남한에서나.
다른 두 작품도 모두 북한의 현대 영화에서 고른 것도 눈길을 끈다. ‘김 동무는 하늘을 난다’는 2012년에 벨기에와 합작으로 만든 작품이다. ‘우리 집 이야기’는 보다 최근작으로 2016년 영화다. 모두 북한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북한의 ‘현실이 영화로 반영된’ 작품들이다.
문제는 이들 영화가 북한의 체제 이데올로기를 다소 세련되지 못한 방식으로 상당 부분 반영해내고 있다는 것이고 그런 장면들이 일부 남한 관객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는 어쩌면 상대를 상대로서 인정하지 못하고 절대적으로 적대시만 해온 지난 70년의 구겨진 역사의식 탓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더불어 그간의 강고하게 진행된 반공교육의 여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북한 영화를 이해하려면 내재적 관점의 접근 방식이 요구된다. 그들의 영화 언어에 왜 늘 원수, 장군 등의 찬양 용어가 등장하는지, 사회주의권에서는 영화가 얼마나 체제 선동의 수단으로 중요시되는지 등등을 감안해야 한다. 그렇다면 러시아와 중국 영화에서는 왜 그런 장면들이 등장하지 않는지 궁금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러시아, 중국 두 나라는 현재 공산당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사회경제 체제를 경유하고 있는 바 상대적으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거나, 자본주의적 소비사회를 적극 확대하되 체제를 부정하지 않는 정도의 수준까지만 표현의 다양성을 인정해주고 있다.
예컨대 할리우드가 최근 내놓은 첨단 액션영화 가운데 ‘마일 22’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 영화는 미국의 피터 버그 감독, 마크 월버그 같은 스타급 배우가 나왔지만 실상은 중국 화이 그룹이 투자한 영화로 로케이션 대부분이 태국 방콕에서 이루어졌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이제 할리우드와 손을 잡고 세계시장에서 블록버스터급 영화로 거액의 수익을 올릴 계획을 착착 진행 중이다. 이런 영화에 시진핑 초상화를 잔뜩 내비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북한 영화는 아직 그 수준까지 오르지 못했는데 그건 북한의 체제와 경제가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북한 영화에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부자의 세습 공산주의에 대한 찬양 이데올로기를 ‘구경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의 중국처럼 북한을 개혁과 개방으로 나아가게끔 적극 지원해야 한다. 북한이 비핵화를 통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세계 정상국가로서 이미지를 회복할수록 남한 관객들에게는 볼 만한 북한 영화가 점점 더 많아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주목받는 신상옥 영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북한 영화의 상영 러시는 일단 ‘신필름’이 주도권을 잡을 공산이 크다. 신필름은 신상옥 감독의 영화사로 지금은 그의 아들인 신정균 감독이 운영하고 있다. 신필름은 신상옥 감독의 모든 영화, 곧 179편 전편에 대한 저작권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그의 북한 영화 여덟 편에 대해서도 우선 권한을 가지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탈출기’(1984),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사랑 사랑 내 사랑’(1985), ‘소금’(1985), ‘불가사리’(1985), ‘심청전’(1985), ‘방파제’(1985), ‘온달전’(1986)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신상옥은 한국 현대영화 100년사에서 가장 불세출의 영화제작자 겸 감독이었으며 그의 북한 영화가 지금껏 온전히 조명받지 못해왔던 점을 감안하면 이들 여덟 편의 영화가 갖는 희소성은 상대적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해 보인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이어 9월 초에 열린 제3회 울주세계산악영화제에서도 북미 합작영화 ‘산 너머 마을’이 소개돼 화제에 올랐다. ‘산 너머 마을’은 남북 이산가족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2012년 영화다. 영화제들이 북한 영화를 소개하는 데 가능한 한 2010년 이후의 최신작으로 하되 체제 선전, 선동 분위기가 덜한 작품, 남북한 대중이 보편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소재와 주제의 작품으로 고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 영화들의 대거 상영 또는 북한 영화인들의 방한 러시는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 최대 규모의 영화제인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실현될 공산이 크다. 부산영화제는 올해 영화제의 상영작들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통해 정부의 법적, 제도적 정비, 보완에 발맞춰 북한 영화나 영화인들의 대규모 초청 계획이 있음을 밝힌 바 있다.
북한 영화의 국내 상영은 지난 7월 초 영화진흥위원회 내에 발족된 ‘남북영화특별교류위원회’를 중심으로 가속화될 전망이다. 여기에 강원도가 의욕적으로 준비 중인 남북평화영화제(조직위원장 문성근, 집행위원장 방은진)의 행보도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들 위원회 또는 영화제 등을 중심으로 북한 영화가 한동안 국내 상영 러시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4·27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세상이 영화를 바꿨다면 이제는 영화가 서서히 세상을 바꿔나가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어느 쪽이든 좋다. 남북한이 평화적 공존의 길을 찾아나서는 것이라면 영화든 세상이든, 그래서 누가 앞장을 서게 되든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