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년 역사 중 신라만큼 화려한 문화를 자랑한 나라가 또 있을까. 과거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는 그 찬란했던 문화를 자랑할 만한 유물과 유적이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경주는 사찰, 궁터, 고분 등에 정교하고 화려한 신라 예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경상북도 경주는 톨게이트를 통과하는 순간부터 눈을 돌리는 곳마다 기와집이 보인다. 이미 시간여행이 시작된 기분이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북촌한옥마을이나 전북 전주시에 있는 전주한옥마을이 말 그대로 ‘조성’한 마을의 느낌이라면 경주는 으레 그래야 한다는 듯 기와를 얹어서 집을 만들고 마을을 이룬 느낌이다. 심지어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까지 기와지붕을 하고 있으니 경주에서 건축허가를 받으려면 기왓장이 필수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뜨겁고 습한 기운이 온몸에 파고든다. 여름 내내 전국을 달궜던 폭염에 비하면 견딜 만하지만 걸어 다니면 땀이 날 정도로 덥다. 더위를 잠시 잊은 채 경주를 둘러보고 싶다면 자전거 여행을 추천한다. 경주는 버스터미널, 기차역, 문화재단지 등 곳곳에 자전거를 대여하는 곳이 많다. 덕분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여행객들이 많은 도시 중 하나다. 늦여름 자전거를 타고 맞는 시원한 바람 덕에 기분까지 맑아진다.
▶ 1 월성지구에 있는 계림길을 자전거로 여행하는 관광객
2 저녁노을이 물드는 대릉원 ⓒ한국관광공사
경주에서 여행객이 많은 장소 중 하나가 ‘월성지구’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경주 역사유적지구’ 5개 중 하나인 월성지구에는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 내물왕릉, 첨성대, 동궁과 월지가 있다. 유적지가 한데 모여 있어 자전거를 타고 유유자적 돌아다니기에 좋은 곳이기도 하다. 자전거로 유적지 곳곳을 돌아볼 수도 있지만 예쁜 조경시설로 유명한 동궁과 월지에서는 자전거 대신 걸어 다니는 것이 좋다. 오래, 자세히 아름다운 경치를 두 눈에 담기 위해서다.
▶ 야경이 아름다운 첨성대 ⓒ한국관광공사
낮에도 밤에도 빛나는 풍경
경주 톨게이트에서 동궁과 월지까지는 차로 10분 남짓이면 도착한다. 동궁은 태자가 살던 별궁이고 월지는 동궁에 딸려 있던 연못이다. 동궁과 월지라는 이름이 생소하게 들릴 수 있지만 ‘안압지’는 어떤가. 우리가 알고 있는 안압지의 정식 명칭이 동궁과 월지다. 발굴 당시 ‘월지(月池)’라는 글자가 적힌 기와가 출토된 것을 보면 신라시대에도 월지라고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왜 월지가 안압지로 불렸던 걸까? 안압지는 조선시대 때 붙인 이름이다. 화려한 문명을 자랑했던 신라가 멸망하고 화려했던 건물과 연못은 폐허가 됐다. 갈대가 무성한 연못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드는 모습을 보고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우리에게 오랜 시간 동안 안압지로 알려졌던 이곳은 2011년부터 동궁과 월지로 불리고 있다. 동궁과 월지가 긴 세월 동안 어떤 이름으로 불렸던 그 당시 사람들이 봤던 풍경과 지금 우리가 보는 광경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연못은 둘레가 1000m 정도 되는 아담한 사이즈다. 연못 가장자리가 굴곡이 많아 어디에서도 한눈에 보기 힘든 구조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월지 전체를 보려면 연못을 한 바퀴 돌아야 한다.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코스다. 아직 더운 날씨라 그런지 연못에 연꽃이 간간이 보인다. 동궁에 있는 임해전에 앉아서 연못을 바라보던 신라 사람들을 상상해본다. 가야금 연주 소리와 월지의 풍경을 안주 삼아 신선놀음을 하던 이들의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술은 얼마나 꿀맛이었을까. 그 당시 사람들이 봤던 풍경을 상상하려면 임해전 앞에서 월지를 바라보는 게 좋다. 임해전 반대편에 서서 보는 풍경도 놓쳐선 안 된다. 화려했던 신라와는 상반되는 수수하고 고요한 매력을 느낄 수 있어서다.
동궁과 월지의 가장 화려한 모습을 보려면 오후 7시쯤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해 질 무렵부터 오후 10시까지 은은한 조명이 햇빛을 대신해 이곳을 비춘다. 해가 저물고 더위가 한풀 꺾여 걷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낮에 봤던 것과는 다른 얼굴을 한 동궁과 월지의 모습이 훌륭하기 그지없다. 조명발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조명이 좀 켜졌을 뿐인데 왠지 모르게 운치를 더한다. 그 때문인지 밤에는 손을 잡고 산책하는 연인의 모습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동궁과 월지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첨성대도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밤에 별을 보기 위해 만든 곳이니 이곳에서 보는 밤풍경은 오죽할까.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 만든 첨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자 신라 건축과 과학기술의 놀라운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적 유물이다. 30cm 높이 돌 361개 반을 사용했고 상층부와 기단을 제외하고 27개단으로 만들어진 석조건축물이다. 맨 위에는 우물 정자 모양의 장대석이 있다. 학자들은 첨성대 맨 꼭대기에 천체관측기구를 설치해 밤하늘을 올려다봤을 것으로 추측한다. 첨성대는 돌의 개수, 단의 개수 같은 세세한 부분까지 의미를 담아서 만들었다. 첨성대 가운데에 난 창문 아래에 막돌을 채우고 기초공사를 탄탄히 한 덕에 1400여 년이 지난 세월을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낮에 첨성대를 방문하면 꽃이 흐드러지게 핀 야생화를 볼 수 있다. 여름 내내 양귀비꽃이 피었던 이곳은 가을을 앞둔 지금은 노란 코스모스와 연꽃이 여행객을 반긴다. 야생화 단지에서 ‘인생 사진’ 건진 사람이 많으니 그 대열에 동참하고 싶다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셔터를 눌러야 한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시간여행 명소
600년 역사 살아 숨 쉬는 서울 북촌한옥마을
ⓒ한국관광공사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 사이에 위치한 북촌은 서울을 대표하는 전통 주거지역이다. 당시 고위관리나 왕족이 거주하는 고급 주택가로 유명했다. 북촌한옥마을은 범위가 꽤 넓어 탐방 코스도 다양하다. 30분가량 동네를 산책하며 도심 한옥의 멋을 느낄 수도 있고, 개방 한옥이 많은 북촌로12길 일대를 돌며 공방 체험도 할 수 있다. 북촌에서도 한옥이 가장 잘 보존된 북촌로11길 일대는 지대가 높아 한옥 지붕들 사이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감상할 수도 있다. 재동 백송, 석정 우물터 등 자연 공간부터 가회동 이준구 가옥, 안국동 윤보선 가옥 등 근대 건축물까지 역사적 공간을 중심으로 더듬어보거나 북촌 8경을 돌아보는 코스도 좋다.
천주교 박해 아픔 서린 서산 해미읍성
ⓒ한국관광공사
충남 서산시에 있는 해미읍성(사적 제116호)은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읍성 중 원형이 잘 보존된 곳으로 꼽힌다. 왜적을 막기 위해 세종 재위 기간인 1421년 완공된 이곳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훈련원 교관으로 10개월가량 근무한 곳이기도 하다. 해미읍성에는 1790년대부터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어진 천주교 박해의 역사가 서려 있다. 읍성 안 감옥 터에 천주교 신자들의 손발과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던 회화나무가 남아 역사를 증언한다. 많은 무명 신자가 순교한 해미천 일대는 1985년 해미 본당 설립 이후 성역화 사업이 진행돼 전국의 천주교 신자의 순례지가 됐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찾았을 때 방문하기도 했다.
타임머신 타고 조선시대로 전주한옥마을
ⓒ한국관광공사
한옥 700여 채가 밀집한 국내 최대 한옥마을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상인들이 성안으로 들어와 상권을 확장하자 이에 반발한 전주 사람들이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을 지어 살기 시작한 것이 시초다. 경기전, 오목대, 전동성당 등 조선시대에서 근현대에 이르는 문화 자원도 풍부하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은 조선 중기 건축의 안정적 구조와 조형미를 보여주는 건물로 한옥마을 10대 명소 중 하나다. 경기전 건너편에는 영화 ‘약속’ 촬영지인 전동성당이 자리한다. 전통시장도 들러볼 만하다. 매주 금·토요일 오후 7시부터 열리는 야시장에는 전주비빔밥, 초밥 외에도 동남아 음식 등 보기만 해도 군침 넘어가는 다양한 먹거리가 즐비하다.
촉석루 난간에 기대 남강을 굽어보다 진주성
ⓒ한국관광공사
진주성은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의 격전장이었다. 왜군과의 2차 진주성 전투(1593년)에서 7만여 명의 민·관·군이 최후까지 항쟁하다 순국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논개가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해 충절을 다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진주성 안에는 촉석루와 의암, 김시민장군전공비, 의기사, 국립진주박물관 등 여러 문화재와 시설이 있다. 영남 제일의 누각으로 꼽히는 촉석루는 미국 CNN이 한국 방문 시 꼭 가봐야 할 곳 50선에 선정하기도 했다. 촉석루 아래에는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으로 몸을 던진 ‘의암’이 있다. 한국 현대 건축의 거장 고 김수근 선생이 설계한 국립진주박물관도 놓쳐선 안 될 볼거리다.
장가현│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