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 시흥시 ‘있기에, 앞서’
등이 불룩 튀어나온 기형 물고기, 떼죽음 당한 어패류…. 1990년대 중반 국민적 공분을 사며 우리 사회를 충격에 몰아넣은 최악의 환경오염 사건을 기억하는가. 우리나라 환경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시화호 오염 사건’이다.
1980년대 정부는 경기 시흥·안산 일대의 시화지구에 간척 사업을 추진하며 인공 담수호인 시화호를 조성했다. 그러나 방조제 완공 이후 시화공단, 반월공단 등 인근 산업단지에서 나온 폐수와 생활하수가 그대로 유입돼 생태계가 심각하게 파괴됐다. 이 사건은 초고속 성장에만 몰입했던 한국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환경 이슈를 정면으로 다루는 계기가 됐다.
이후 시화호를 되살리기 위해 장기간에 걸쳐 정부·지방자치단체·시민단체가 합심해 대규모 생태 복원 프로젝트를 펼쳤다. 덕분에 ‘죽음의 호수’였던 시화호는 다시 생태계의 보고로 돌아왔다. 그러나 오명을 말끔히 씻기란 쉽지 않은 듯하다. 아직도 대중의 머릿속엔 ‘시화’ 하면 ‘환경오염’이라는 달갑지 않은 수식이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 시화호 사태로 겪은 고통의 시간을 건축으로 치유하는 의미 있는 공간이 생겼다. 시흥스마트허브(옛 시화공단) 안의 재생문화공간 ‘있기에, 앞서(Be, Fore)’다. 이 공간은 2011년부터 시흥시가 단계적으로 진행 중인 ‘맑은물상상누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됐다. 맑은물상상누리는 하수종말처리장인 정왕 물환경센터 내 가동을 중지한 일부 유휴시설을 문화공간으로 만드는 사업이다. 2019년 전체 대상 구간 중 일부가 완성됐고 ‘있기에, 앞서’는 2024년 리모델링을 마친 후 일반에게 공개됐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열린 공간
산업 시설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시적인 이름은 이 공간이 지향하는 바를 함축한다. “부지에 처음 방문했을 때 이 공간의 용도를 단기간에 인위적으로 소수의 사람이 결정해선 안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제안하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무언가가 있기 전에 다양한 행위가 펼쳐질 수 있는 배경을 제공하자고 생각했습니다.” 공간을 설계한 건축가 정이삭(에이코랩건축사사무소 대표) 소장의 설명이다. 그는 공공건축의 ‘비(非)결정성’과 ‘개방성’을 강조했다.
정 소장은 ‘건축은 단순히 건물을 설계하는 것을 넘어 사회를 대하는 태도’라는 신념을 갖고 공공성과 장소성을 깊이 탐구해온 건축가다. ‘DMZ 평화공원 마스터플랜 연구’, ‘철원 선전마을 아티스트 레지던시’, ‘연평도 도서관’ 프로젝트 등을 통해 최소한의 개입으로 도시 기반 시설이나 비어 있는 장소가 원래 지닌 의미를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줬다. 2016년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 공동 큐레이터, 2020년 원주 미군기지 캠프롱에서 열린 문화행사 ‘캠프 2020’ 총감독을 맡으며 공공건축에 대한 철학적 비전을 제시하기도 했다.
‘최소한의 개입’ 원칙은 이번 프로젝트에서도 중요한 개념이었다. 정 소장은 하수처리 시설의 작동 원리에 주목해 기존 대지에서 희미해진 맥락을 찾아낸 뒤 최소한의 경험 장치를 추가했다. 이를 통해 용도 폐기된 기존 시설과 새롭게 추가된 구조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과거와 현재가 함께 호흡하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초기 42억 원이었던 공사비가 10억 원으로 줄어든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

농축조와 분배조의 변신
주어진 공간은 가동을 멈춘 농축조 세 개와 분배조 한 개였다. 농축조는 슬러지(오염물 찌꺼기)를 모아 탈수 처리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시설이고 분배조는 슬러지를 농축조 등 다른 탱크로 분배해주는 시설이다. 개별로 묻혀 있던 네 개의 탱크를 연결해 하나의 동선을 만들었다. 완전히 새로운 시설을 삽입하기보다 계단 구조물과 빛이 새어 들어오는 연결 통로를 만드는 식으로 기존 공간을 색다르게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대형 농축조 하나엔 목재로 된 나선형 계단 구조물을 설치했다. 계단을 따라 거대한 탱크의 내부에 들어서면 일단 어마어마한 규모에 압도된다. 탱크를 덮은 원형 지붕은 중세 성당의 돔을 연상시킨다. 오랜 세월 먼지로 얼룩진 지붕의 섬유강화플라스틱(FRP)을 통해 햇빛이 투과되면서 초현실적인 풍경이 연출된다. 또 다른 농축조는 아예 지붕을 걷어냈다. 이후 탱크의 둥근 벽면을 따라 목구조를 세워 가운데가 뻥 뚫린 도넛 모양의 정자를 만들었다. 이곳 이름은 ‘팀버 아트리움(Timber Atrium)’이다. 마지막 농축조는 일부만 해체해 원형을 살렸다. 탱크 벽면에 남아 있는 옛 수조의 오염 흔적이 공간의 역사를 말해준다.
세 농축조의 가운데에 분배조가 있다. 분배조는 기존 시설의 일부를 해체하고 상부를 증축해 타워처럼 바꿨다. 꼭대기엔 천창을 설치해 어두컴컴했던 실내에 하늘빛이 들어오도록 했다. 상부 구조는 아치와 돔의 중간 형태로 인류의 원시 공간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모양이다. 고대 유적을 탐험하듯 쓸모를 다한 후 방치된 산업 시설에 깃든 시간을 음미하게 한다.

영상·패션 화보, 전시장으로
“사람들이 과거엔 거대한 성전 같은 종교 공간에서 숭고함을 느꼈다면 요즘은 인간 스케일을 초월하는 거대한 폐산업 공간에서 그런 장엄함을 느낍니다.” 정 소장은 “아이러니하게도 폐산업 공간과 인류의 원시적 공간이 유사한 형상적 감각을 지닌다”며 “기존 모습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최소의 건축적 제스처를 덧대 우리의 무의식에 내재한 공동체를 건축적 형상으로 구현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노후화된 산업 시설을 재생해 독특한 감각적 체험을 주고 훼손된 생태를 되살리는 디자인을 ‘포스트 인더스트리얼(Post-industrial) 디자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 이 공간은 영상 및 패션 화보 촬영, 전시장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빈 캔버스를 제공하고 사용자들이 그림을 채워나가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건축가의 의도에 부합한다. 미래의 무엇이 있기에 앞서 현재가 마주해야 할 것들을 묻는 공간. ‘있기에, 앞서’는 열린 틀(Open framework)로 존재하는 공공건축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김미리 문화칼럼니스트
새 밀레니엄의 시작과 함께 신문사 문턱을 가까스로 넘은 26년 차 언론인. 문화부 기자로 미술·디자인·건축 분야 취재를 오래 했고 지금은 신문사에서 전시기획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