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끌 모아 태산.’ 저축 하면 생각나는 말이다. 해마다 10월의 마지막 화요일은 ‘저축의 날’이다. 1964년 지정된 이후 1973년부터는 정부가 주관하는 기념일로 격상됐다. 지금의 40대 이상 세대들은 반드시 저축을 해야 한다고 학교에서 배우고 익혀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저축의 의미가 많이 퇴색한 듯하다. 1997년까지는 저축추진중앙위원회가, 저축추진중앙위원회가 해산된 1998년부터는 한국은행이, 2008년부터는 금융위원회가 ‘저축의 날’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소비가 미덕으로 칭송받는 시대에 저축 증대 정책이 그동안 어떻게 달라져왔는지 살펴보자.
1964년 저축의 날 지정, 1965년에는 연 30%의 금리 지급
1980년대 이후에는 정부 중심에서 민간 주도로 주체 바뀌어
1960년대 저축 정책은 1962년 2월에 제정된 ‘국민저축조합법’에 따라 직장과 단체에서 국민저축조합을 결성해 매월 일정액 이상을 저축하게 한 데서 시작됐다. 정부는 그해 6월에 제2차 통화개혁을 단행했고, 1964년에 저축의 날을 지정했다. 1965년에는 최고 예금 금리를 기존의 연 15%에서 대출 금리를 훨씬 웃도는 연 30%로 끌어 올린 역금리 제도를 실시했다. 시중의 많은 여유자금을 금융기관으로 유치하고, 자발적인 민간 저축과 강제 저축을 병행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정부는 1969년 2월에 국내 주요 은행, 증권사, 경제·산업단체, 각계 저명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저축추진중앙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던 제3공화국 정부는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외자(外資) 의존도를 낮추고 저축을 통한 내자(內資)의 축적을 강조했다. 이 무렵 우리나라 저축은 정부 저축과 인플레이션을 통한 강제 저축이 대표적이었다.
▶ 1970년대 초등학교에서는 저축 장려를 위해 담임선생님이 학생들로부터 저금을 받았다. ⓒ동아DB
1970년에 정부는 ‘저축 증대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는데, 그해 우리나라 저축액은 5069억 원이었다. 1972년에는 8·3조치를 단행해 사채를 동결하고 기업의 이자 부담을 줄이는 정책을 추진했다. 1973년에는 저축 정책을 심의하는 ‘국민저축추진중앙협의회’를 국무총리실 산하에 설치했다.
정부는 1976년에 근로자의 재산 형성 저축제도를 도입해 중산층 이하 근로 소득자들의 저축 증대를 촉진했으며, ‘저축 증대에 관한 법률’을 ‘저축 증대와 근로자 재산 형성 지원에 관한 법률’로 개정했다. 1977년에는 가계 당좌예금제도를 신설하는 동시에 재형저축 가입 대상을 월 소득 40만~50만 원까지 확대함으로써 저축을 유도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저축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기 위해 정부는 박목월 작사, 나운영 작곡의 ‘저축의 노래’를 LP판으로 제작해 보급하기도 했다. 봉봉사중창단과 이시스터즈가 불렀던 노래 가사는 이렇다. "알뜰히 살아보세 힘써 일하고 한 푼을 아껴 쓰며 늘리어 보세. 허공에 뜬 행복을 잡으려 말고 푼푼이 모아 모아 쌓아 올리세. (후렴) 티끌도 모이면 태산이 된다네. 우리도 아껴 모아 잘 살아보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법률과 제도 개선을 통한 1970년대까지의 저축 증대 정책은 정부의 노력에 비해 효과가 미약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민간이 주도하는 자발적인 저축 증대를 모색했다. 우리나라의 저축액은 1980년에 4조1325억 원에서 1988년에는 8조7025억 원으로 늘어났다. 1988년에 39.3%까지 상승했던 국민 저축률은 그 후 소비 증가율이 소득 증가율을 앞지르면서 완만한 하향 곡선을 그렸다. ‘저축 증대에 관한 법률’에서 1976년에 ‘저축 증대와 근로자 재산 형성 지원에 관한 법률’로 개정된 저축 증대 관련법은 1987년에 ‘근로자의 주거 안정과 목돈 마련 지원에 관한 법률’로 다시 개정됐다. 새 법에서는 저축추진중앙위원회의 존속 기한을 1997년 12월 31일로 못 박았다.
1988년 39.3%였던 저축률이 지금은 5%대로 추락
청년 일자리 창출과 연계한 저축 상품 정책은 좋은 사례
1990년대 접어들어서는 저축률이 점점 하락했다. 국민 저축률은 1990년 37.5%에서 1995년에는 35.5%로, 1997년에는 33.4%로, 1999년에는 30.2%로 점점 하락했다. 소득은 줄어든 데 비해 소비 지출은 크게 증가해 저축을 할 수 없었고, 그에 따라 국민 총 저축률이 크게 낮아진 것이다. 1999년 국민 총 저축에서 정부 저축은 1998년에 비해 0.8% 상승했으며 민간 저축은 3.9% 하락했다.
1997년에는 법에 따라 저축추진중앙위원회가 해산됐다. 우리나라가 1999년에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 들어가자 정부는 10여 개에 이르던 세금 우대 저축을 하나로 통합해 예금자 혜택을 줄이고 신용카드 소득공제를 신설하며 소비를 권장했다. 이에 따라 저축률은 더 낮아지게 됐다.
▶ 저축의 날에 시민들에게 저금통을 나눠주고 있다. ⓒ동아DB
2000년 이후에는 소비가 권장되고 저축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저축률이 한자리 숫자에 머물며 등락을 지속하고 2010년 이후로는 대략 5%대 수준에 머물고 있다. 저축률이 12~13% 수준인 독일과 프랑스 같은 선진국과 비교하면 매우 낮은 수준이다. 정부는 올해부터 ‘저축의 날’을 ‘금융의 날’로 명칭을 변경했다. 금융위원회는 그 이유를 "국민의 재산 형성 방식이 저축뿐 아니라 펀드 투자로 다양화되고 금융의 역할도 확대된 기류를 반영한 조처"라고 설명했다.
국민 각자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해야 하겠지만 정부에서도 ‘미소드림적금’이나 ‘농어가목돈마련저축’ 같은 정책성 저축 상품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한다. 청년 일자리 창출과 연계한 저축 상품 정책도 좋은 사례이다. 정부는 중소기업 인턴을 거쳐 정규직으로 취업한 뒤 2년간 300만 원을 저축하면, 회사에서 300만 원과 정부에서 600만 원을 지원해 모두 1200만 원의 목돈을 쥐어준다는 정책을 2016년 7월 1일부터 시작했다. 대상은 15세부터 34세까지의 청년 1만여 명이다. 저축 수익률 200%를 제시하며 청년들의 중소기업 취업을 유도한다. 저축 정책과 일자리 창출 정책의 융합 정책이라 할 만하다.
2016년에 52회째를 맞은 ‘저축의 날’은 소비에 밀려 점점 그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 그렇지만 100세 시대를 행복하게 준비하려면 건전한 소비 습관 못지않게 저축하는 습관을 몸에 스며들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소비가 미덕이라는 말은 부분적으로만 옳다. 저축이 없으면 소비도 없다. 따라서 저축은 미래의 소비를 위한 준비 운동이 아니겠는가.
글· 김병희(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전 한국PR학회 회장) 2016.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