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와 계절은 기분이나 감정 상태만큼이나 음악 듣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 매일같이 그날의 날씨에 어울리는 음악을 제대로 고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요즘 같은 가을 하늘 아래에서는 어떤 음악이든 감성을 짜릿하게 자극하는 것만 같다. 어떤 음악을 통해 파란 하늘을 날아오르는 듯한 멋진 느낌을 얻는다면 이는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감정이 아닐까?
그 절정은 역시 한가위다. 혹 늦더위가 심술 가득한 표정으로 자존심을 세우고 있어도, 또는 얄궂은 가을비로 인해 불편한 성묘길이 될지라도, 추석이 가을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 특별한 계절의 소중한 날들이 지니는 의미는 풍요로움과 따사로움, 화사한 그리움과 같은 것이다. 사계절의 어느 하늘도 이처럼 투명하거나 깊지 않고 어떤 푸른빛도 가슴에 이토록 포근히 내려앉지 않는다. 너그러움과 강인함을 동시에 지니는 바람과 햇살은 또 어떠한가. 다른 때보다 더욱 크고 넓게 많은 걸 품을 준비가 된 감성은 조바심 대신 여유로움으로 가득하다. 거기에 싱그러운 음악이 차곡차곡 담길 때 가을빛은 더욱 짙어지고, 내 안에서 음악은 그 빛의 활기를 닮아간다.
그중 가을의 향기를 한껏 담아낸 듯한 한가위의 귀성길이나 모처럼 고향집에서 맞이하는 여유롭고 한가로운 시간에 함께하기에 좋은 음악은 어떤 것들일까? 이 플레이리스트는 기존 가요의 작법과 스타일에서 벗어난 어쿠스틱 사운드와 예쁘고 섬세한 감성이 담긴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 대중음악이다. 아티스트 이름조차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계절의 분위기에 더없이 잘 녹아드는 매력적인 인디 음악들이다.
▶ 이승열 앨범 ‘돌아오지 않아’, 심규선, 덕원의 앨범 ‘왜죠’, 언니네 이발관 앨범 ‘푸훗’ 사진들(위부터)
푸훗 언니네 이발관
지난 6월 마지막 앨범을 발표한 언니네 이발관의 시작은 21년 전의 이 곡이었다. 상큼하고 기분 좋은 기타 연주와 한 번만 들어도 흥얼거리게 되는 뛰어난 멜로디, 그저 풋풋하고 사랑스럽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할 정도의 소박하고 순수한 목소리와 꾸밈 없이 맑은 감성으로 가득한 곡. ‘잘하는 노래’와는 거리가 먼 이석원의 보컬이나 아직은 설익은 연주, 그리고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감성과 솔직한 사운드 프로덕션 등 ‘인디’스러운 작품임에 틀림없지만,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그 빛을 잃지 않는 강렬한 매력을 지닌 작품이다.
왜죠 심규선, 덕원
한국 인디 신의 명곡 ‘보편적인 노래’의 주인공 브로콜리너마저의 보컬리스트이자 베이시스트인 덕원이 곡을 쓰고 뛰어난 감수성을 지닌 싱어송라이터 심규선과 함께 노래한 ‘왜죠’는 헤어진 연인의 대화를 통해 사랑하는 이에게 가지는 아쉬움과 미련을 아련한 아픔으로 표출해낸다. 둘의 조합은 더할 수 없이 이상적이며 그 시너지는 조용하고 나직하지만 강렬한 매력이 되어 귓가에 울려온다.
한숨이 늘었어 에피톤 프로젝트
에피톤 프로젝트는 작곡과 보컬, 키보드 연주 등 탁월한 재능을 지닌 차세정의 솔로 프로젝트 이름이다. 심규선과 한희정, 조예진, 이진우 등 여러 객원 싱어들과 함께한 데뷔 앨범은, 공일오비나 토이 등에 비견돼온 그의 아련하고 아름다운 감성이 빛을 발하는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한숨이 늘었어’는 음악의 중심에 곡의 힘이 자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뛰어난 작곡과 편곡, 매끄러운 이진우의 보컬 등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곡이다.
스무 살 푸른 새벽
기타리스트 정상훈과 보컬리스트 한희정이 결성했던 듀오 푸른 새벽의 2003년 데뷔작은 평단에서 극찬을 받았던 작품이다. 밝음보다 어두움, 역동성보다 고요함, 화려함보다 소박함, 현실보다 꿈, 머리보다 가슴에 가까이 다가서 있는 곡 ‘스무 살’은 앨범을 대표할 만한 곡이다. 가슴 아리도록 슬프고 섬세한 여성적 감성이 처연하게 드러나는 노랫말, 비현실적 몽롱함과 탐미적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내 보이는 듯한 슬라이드 기타와 느릿하게 반복되는 리듬, 그리고 감정이 절제된 목소리에 묻어나는 짙은 호소력이 가슴을 파고든다.
우주에서 온 노래 머쉬룸즈
보컬과 기타 연주를 맡은 완, 기타리스트 식보이, 드러머 준서로 구성된 3인조 그룹 머쉬룸즈는 감성적인 노랫말과 따사롭고 서정적인 멜로디를 차분한 어쿠스틱 사운드와 보컬에 실어 들려준다. 도입부에 등장하는 오래전 PC통신 시절의 친숙한 전화 연결음에서부터 포근함을 전하는 맑은 어쿠스틱 기타와 은은한 첼로의 나직한 울림, 마음을 편안하게 이끌어주는 목소리 등 매혹적인 요소들로 가득한 작품이다.
돌아오지 않아 이승열
유앤미블루(U&Me Blue) 시절부터 이승열의 목소리에는 ‘영혼을 울리는’ 짙은 향기가 담겨 있었다. 더욱 어둡고 우울한 감성, 때로 실험성 짙은 그의 사운드는 대중적인 환호 대신 진지하게 음악을 듣는 이들을 중심으로 특유의 음악성과 색채를 인정받아왔다. 예의 신비로움 가득한 에너지가 포크 록의 형식에 실려 감미로움과 웅장한 아름다움이 되는 ‘돌아오지 않아’는 이승열의 한없는 매력이 넘쳐 흐르는 뛰어난 곡이다.
버스가 많이 밀렸어 밀크티
보컬리스트 레미, 기타리스트이자 프로듀서인 지우영으로 구성된 혼성 듀오 밀크티가 2012년 발표한 싱글이다. 연애의 설렘을 주제로, 레미의 맑고 순수하며 호소력 있는 목소리와 퍼커시브 주법을 들려주는 지우영의 어쿠스틱 기타 연주가 예쁜 멜로디에 어우러지며 꾸밈 없는 진솔한 매력을 선사해준다. 마치 눈앞에서 직접 연주하고 노래하는 듯 깊은 공간감이 인상적이다.
그러니까… 십센치
홍대 인디 신의 어쿠스틱 붐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던 십센치는 가벼움과 재미를 진지함으로 녹여내는 특유의 재능과 뛰어난 작곡 역량을 갖춘 듀오다. 권정열의 속삭이듯 차분한 목소리에는 과거에 대한 향수와 현대적 세련미가 동시에 담겨 있고 윤철종의 기타는 센티멘털리즘의 극치를 보인다. 두 번째 정규 앨범의 ‘그러니까…’는 그러한 이들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미니멀한 구성 속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 은은한 향기를 뿜어낸다.
View 센티멘탈 시너리
감성적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들려주었던 센티멘탈 시너리는 국내에서는 흔치 않은 전자음악과 팝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세련되고 우아한 사운드를 만들어낸 김경용의 솔로 프로젝트다. 그의 여러 작품 중 포스트 록 스타일의 연주와 웅장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담은 신시사이저 사운드로 가득한 ‘View’는 최고의 카타르시스를 전하는 아름다운 곡이다. 차갑지만 그 안에 담긴 따스함은 연주곡임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I’ll See You There (그곳에서) 천상혁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인 천상혁의 연주에는 오래전 이병우의 쓸쓸함 가득한 서정성을 연상케 하는 매력이 담겨 있다. 그의 뛰어난 핑거 스타일 연주는 음 하나하나에 생명력을 쏟아 넣은 듯 감정을 자극하고 뉴에이지 풍의 어쿠스틱 사운드는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준다. 몇 곡의 커버 곡들과 더불어 자작곡을 담은 데뷔 앨범에서 스물한 살의 젊은 기타리스트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깊이를 펼쳐 보인다. 그 중심에 자리한 작품이 바로 이 곡이다.
김경진 | 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