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수상한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를 보면서 ‘일생에 단 한 번이라도 저토록 절실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생의 축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언어장애를 앓는 일라이자가 ‘괴물’이라 불리는 수중생명체에게 느끼는 사랑은 ‘이곳이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강렬한 감정이었다. 나는 그녀의 감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처음부터 나 또한 그 ‘신비로운 괴물’의 슬픔과 외로움에 매혹되었다. 내 눈에는 그가 처음부터 ‘괴물’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아름다운 존재로 보였다. 밀림 속에서 살아가는 원주민들은 그를 ‘신’으로 추앙했지만, 과학의 이름으로 그를 연구하기 위해 납치해온 사람들은 그를 ‘괴물’이라 부르며 고문하고 학대했다. 연구소의 청소부로 일하는 일라이자는 홀로 고통받으며 그 어떤 구조 신호도 보내지 못하는 ‘그’를 보며 짙은 연민을 느낀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외로운 것은 처음 봤어요.” 그녀는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외로운 것’이라 칭하지만, 사실 그녀는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관리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대한다. 그녀는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는 그를 향해 맛있는 달걀을 건네고, 음악을 들려주고, 춤추는 모습을 보여주며 삶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님을 일깨운다.
일라이자는 평생 외롭게 살아왔던 자신에게 찾아온 단 한 번의 진실한 사랑, ‘그’를 살리는 길이 곧 그가 원래 살던 거대한 물속으로 그를 보내는 것뿐임을 알게 된 뒤 슬픔에 휩싸이지만 ‘그를 보내야 한다’는 결심에는 변함이 없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 그를 ‘놓아주는 것’임을 깨닫는 순간, 일라이자의 사랑은 끝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롭게 시작되는 느낌이다. 그가 없는 곳에서도 그를 사랑할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일라이자에게 있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일라이자는 그 누구에게도 완전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불쌍하게 생각하거나, 무시해도 좋은 존재로 생각했다. 그런데 괴물은 처음으로 일라이자를 ‘완전한 존재’로, 어떤 부족함도 없는 존재로,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존재로 바라봐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그를 사랑할 이유는 충분한 것이 아닐까.
사랑이 늘 그 한자리에 있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집착하고, 의심하고, 시험하는 사람들은 “이게 다 널 사랑해서야”라고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합리화하지만, 그것은 이미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아니라 타인의 감정을 조종하려는 통제의 욕망일 뿐이다. 이 작품의 원작소설 부제는 ‘형태도 모양도 다양한 사랑을 위하여’다. 아하, 그렇구나. 그 온도와 주변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처럼, 우리 살아 있는 생명체들의 사랑도 그렇게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는가. 그것은 사랑의 ‘대상’이 변한다는 뜻뿐 아니라 그 사랑의 온도, 모양, 빛깔, 성질까지 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때로는 창가에 떨어져 흩어지는 빗물처럼, 때로는 꽁꽁 얼어 도저히 깰 수 없을 것 같은 얼음처럼, 때로는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수증기처럼. 나는 일라이자의 사랑을 통해 누구도 응원하지 않는 사랑,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랑이라 할지라도 그 사랑 속으로 기꺼이 인생을 던질 수 있는 용기의 소중함을 보았다.
정여울│작가,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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