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잘 안 나오고 매사에 의욕도 없고. 혼자 있고 싶어요."
"실어증입니다."
"네? 언어장애?"
"아뇨, 일하기싫어증."
이 대화는 한 컷짜리 웹툰 ‘약치기 그림’에 나오는 ‘뚜렷한 증세’ 편이다. "꿈이 없었던 내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꿈이란 걸 꾸게 되었어. 퇴사라는 꿈, 퇴몽이야"의 제목은 ‘Dreams come true’. "‘토’하고 ‘일’어나면 주말 안녕"의제목은 ‘월화수목구토일’이다.
만화가 양경수(32) 씨가 누리소통망(SNS)에 연재하는 ‘약치기 그림’은 빵빵 터지는 웃음을 선사하는 웹툰은 아니다. 가벼운 말장난 같으면서도 가슴을 시원하게 만드는 익살과 촌철살인이 있다. 특히 달라진 직장 세태를 반영한 에피소드가 좋은 반응을 얻는다.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경영자의 마인드로 열심히 일할 테니 경영자의월급을 주세요’,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았으니 일도 쥐꼬리만큼만 하고 가야지’ 등의 대사와 함께 등장하는 일러스트는 직장생활의 애환과 분노를 콕 집어내 직장인들의 공감을 산다.
▶직장인의 애환을 유쾌하게 비튼 그림으로 누리소통망 (SNS)에서 화제가 된 만화가 양경수의 ‘약치기 그림’. ⓒ약치기 그림 누리소통망(SNS)
그의 작품이 연재되는 SNS 댓글에선 ‘왜 여기다 내이야기를 써놨느냐’, ‘제목이 다 했다’라는 동조가 터져 나온다. 그의 SNS 페이지에 ‘좋아요’를누른 누리꾼은 15만 명 가까이에 이른다. 올해 11월엔 그동안 직장인의 애환을 그린 작품을 모아 그림 에세이 〈실어증입니다, 일하기싫어증〉(오우아)을 출간했다. 직장인이 직장인 웹툰에 열광하는 건 그 저변에 공감 코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요즘 자주 쓰는 신조어로 ‘웃픈(웃긴데 슬픈)’ 상황이다.
직장인 애환 그린 웹툰, 웃픈 상황이 공감 이끌어내
누리꾼들 댓글 달며 웹툰과 다른 또 다른 재미 얻어
‘약치기 그림’을 비롯해 직장인과 직장생활을 소재로 삼은 웹툰은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사랑 타령 일변도였던 웹툰 시장이 직장인들의 비애를 담은 스토리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게임회사에 다니는 여성 직장인이 주인공인 웹툰 ‘게임회사 여직원들’은 디자이너, 기획자, 개발자 3명의 여직원이펼치는 개성 만점 직장 이야기를 담았다. 만원 지하철에겨우 몸을 집어넣고 환승구간을 재빠르게 통과해 출근하는 과정을 게임으로 만들겠다는 내용은 게임업계 종사자뿐 아니라 직장인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 웹툰 ‘게임회사 여직원들’ ⓒ다음웹툰
‘흙수저’ 청년의 열혈 면접기를 그린 웹툰 ‘나의 목소리를 들어라’로 유명한 만화가 이현민(35) 씨도 직장생활을 작품 소재로 택했다. 실제로 광고회사에서 일하기도 했다는 이현민 작가가 시리즈물로 선보인 웹툰 ‘질풍기획’은 ‘두꺼운 고기도 썩~ 썩~ 썰 만큼 정말 얇은 TV란 내용으로광고를 만들었어. 이걸 본 전무가 나한테 모니터를 머리에 이고 복도에 서 있으라고 했지. 의미 있는 광고였어. 이때 내 월급봉투가 얇아졌거든’이라는 자조 섞인 대사로 독자의 공감을 끌어낸다.
▶ 웹툰 ‘질풍기획’ ⓒ네이버웹툰
웹툰 ‘연봉신’은 아예 스물아홉 대졸 구직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지원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스펙이 떨어지는 주인공 연봉신이 화학회사에 입사하면서 겪는 에피소드를 다뤘다. ‘연봉신 시즌1’에 이어 ‘연봉신 시즌2, 아프리카에 가다’까지 인기리에 완결했다. 앞으로 연봉신 시즌3 연재를 계획하고 있다.
▶ 웹툰 ‘연봉신' ⓒ네이버웹툰
웹툰 ‘가우스전자’는 다국적기업을 배경으로 삼고 샐러리맨을 주인공으로 택했다. 직장생활 이야기에 ‘병맛(맥락이 없고 형편없으며 어이없음을 뜻하는 말)’ 유머를 더해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현재 시즌3이 연재 중이다.
▶ 웹툰 ‘가우스전자’. ⓒ네이버웹툰
‘약치기 그림’, ‘가우스전자’ 등 현대 직장인 삶 비틀어
젊은 층의 좌절과 공감 반영, 새로운 콘텐츠로 부상
직장인 웹툰 시대를 연 것은 만화가 윤태호(48) 씨의 ‘미생’이다. 바둑 프로기사를 목표로 살아가던 장그래가 입단에 실패하고 회사라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서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뤘다. 종합상사를 무대로 삼은 미생은 바둑과 직장생활을 절묘하게 엮어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렀다. 달달한 로맨스도 아니고, 눈이 즐거운 판타지도 아닌 평범한 직장인의 삶. 대한민국 직장인은 왜 자신의 이야기에 열광할까.
▶ 웹툰 ‘미생’. ⓒ다음웹툰
직장과 직장인이 웹툰 콘텐츠의 소재로 쓰이는 건 새롭지 않다. 하지만 경제 상황이 궁핍해지고 조직문화가 경쟁을 추구할수록 생업의 터전이라 할 수 있는 직장생활은 고단하게 마련이다. 통계에서도 직장인의 팍팍한 삶이 드러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올해 8월 발표한 ‘2016 고용동향’에 따르면 2015년 한국 근로자의 1인당 평균 노동시간은 2113시간이었다. 하루 법정 노동시간 8시간으로 나누면 365일 중 264일, 1년의 70% 이상을 일하며 보내는 셈이다. 현실의 피로를 풀기 위해 직장인들이 가장 쉽게 접하고 소비하는 콘텐츠는 웹툰이다. 웹툰 플랫폼 서비스 투믹스가 올해 9월 19일부터 25일까지 자사 회원 511명을 대상으로 ‘웹툰도 독서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한 회원이 83%(426명)에 달했다. 그 이유로 ‘문화생활의 한부분을 차지한다’는 대답이 94%(399명)로 가장 많았다.
박석환 만화평론가(한국영상대 만화창작과 교수)는 "웹툰은 직장 내 딱딱한 위계질서를 반전을 통해 웃음으로 승화시키기 좋은 아이템이다. 비정규직, 고용 불안 등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웹툰의 메시지가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직장인을 소재로 한 웹툰은 새로운 콘텐츠를 양산한다. "과거 웹툰이 ‘초밥왕’과 같은 한 분야에서 고수가 되는 과정을 그렸다면 요즘은 풍자를 통해 웃음을 이끌어내거나 판타지와 접목한 새로운 직장문화 콘텐츠로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게 박 평론가의 평가다.
글· 김건희(위클리 공감 기자) 2016.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