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직업을 가수라고 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흘렀다. 1990년 ‘투투’로 데뷔한 지도 24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나를 기억하는 세대도 그만큼 나이가 들었을 거다. 가수라는 직업을 접고 인터넷 쇼핑몰을 시작한 지도 벌써 8년째다. 그 사이 변화도 많았다.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불혹이 지나 쌍둥이의 엄마가 됐다.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들 돌보랴, 일하랴 정신 없는 ‘워킹맘’으로 살고 있다.
‘시간이 왜 이렇게 빠를까’ 원망스러워질 때쯤 1년에 한두 번은 늘 한결같은 곳을 찾게 된다. 강원도 평창이다. 마치 시간을 거스른 듯 나를 맞이해 주는 그곳은 내가 자란 고향이기도 하다.
고등학교를 강릉에서 다니기 전까지 살았으니 유년시절의 내 모든 기억은 평창에 있다. 아주 작은 시골인 평창은 내게 아주 커다란 놀이터였다. 여기저기가 모두 논밭이고 개울이 멀지 않은, 주변이 숲으로 뒤덮인 시골이었다.
지금의 남편과 연애하면서 평창을 한 번 더 찾았는데 유독 기억에 남는다. 2011년 7월 즈음,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결정이 난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2010년 10월 23일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남편을 만난 지 꼭 1년이 되던 날인 2011년 10월 23일 웨딩마치를 울렸으니 한창 달달한 연애 중이기도 했다.
평창 유치 결정 중계방송을 보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보긴 했지만 결과에는 덤덤할 줄 알았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우리나라, 내 고향에서라니. 나는 당시 연인이었던 신랑에게 당장 강원도에 가자고 졸랐다.
두 시간 반 정도를 달려 도착한 평창. 어린 시절 참 커보였던 마을 곳곳의 흔적을 찾아보고, 고향 내음에 취하며 시간을 보냈다. 눈앞에 펼쳐진 평창 알펜시아 리조트는 더욱 감격스러운 현장이었다. 날씨는 약간 흐렸고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벅찬 가슴 때문인지 기온이 낮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일이 터졌다. 기분이 매우 좋아 흥분한 나머지 알펜시아 리조트 사진을 각자 SNS에 올렸고, 같은 시간 같은 배경의 사진으로 인해 열애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연인과 올린 SNS 사진 덕에 열애설 불거져
그 시각 이런 사실을 알 턱이 없던 우리는 산채정식을 먹으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산채정식은 둘 다 강원도에 들르면 반드시 먹는 메뉴 중 하나다. 산채정식이 특별한 이유는 된장 때문이다. 다른 된장들과는 달리 강원도 된장은 약간 거무스름한 빛이 감도는데 좀 더 깊은 맛을 낸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내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내게 고향은 그런 곳이었다. 뭔가 오랜 시간을 묵혀 두고 간직한 느낌이다.
근처에 있는 월정사에도 들렀다. 한적한 사찰 주위를 걷다 보니 시간이 멈춘 듯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더욱 달콤하기만 했다.
무뚝뚝한 나에 비해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남편, 그래서 연애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고 그 설렘도 오래가는 듯했다.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기 아쉬워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강릉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다는 그대로였다. 경포대의 넘실대는 파도를 보다 보면 잊고 있었던 생각들이 떠오른다. 잠겨 있던 자물쇠를 어렵지 않게 끄른 느낌이랄까. 그와 나는 오징어회 한 접시를 안주 삼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렇게 우리 사랑도 바다만큼 커져갔던 것 같다. 그 해 여름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것처럼 느껴지는 건 그래서인지 모른다.
서울에 오자 한바탕 열애설로 난리가 나 있었다. 어이가 없어 한참 웃었다.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의 기쁨을 기념하러 고향에 갔다가 열애설로 마무리가 된 여행이라니. 뭐, 덕분에 잊을 수 없는 두 가지 추억이 생긴 셈 치기로 했다.
나는 이후로도 종종 그곳을 찾는다. 갈 때마다 숨을 고르고 오기도 하고, ‘한 템포 쉬어야지’ 마음을 가다듬는 곳이기도 하다. 신랑과도 1년에 한두 번은 꼭 가자고 약속했다.
그와 백년가약을 맺은 지도 3년. 이제는 쌍둥이 아들들과 씨름하느라 그때 평창의 풍경과 추억을 잊고 산다.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네 명이 된 우리 가족이 한 번 들러야겠다는 마음이 앞선다. 아이들이 좀 더 큰다면 이야기해 주고 싶다. “여기가 엄마가 꿈꾸며 자란, 사랑하는 아빠와 소중한 추억을 만든 곳이란다.”
글·황혜영(가 수·사업가) 2014.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