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 중기부 장관(왼쪽)이 최제형 형제슈퍼 사장과 ‘스마트슈퍼 1호점’ 개점식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중소벤처기업부
24시간 운영 스마트슈퍼 1호점 가보니
이 가게를 찾아갔지만 주인도 점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자정부터 오전 9시까지는 무인점포로 운영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가게 문 앞에 있는 기기에 신용카드를 대고 문을 열 수 있었다. 일종의 본인 인증이다. 그렇게 들어선 가게에 사람은 없지만,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이 8개 각도로 촬영 중이었다. 손님도 이를 볼 수 있도록 8개 화면이 계산대 위에 걸려 있었다.
물건을 고르고 계산대에서 바코드를 스스로 입력했다. 가게에 들어올 때 댔던 카드로 결제를 진행했다. 구입에서 계산까지 과정은 기업체 편의점이나 대형마트 무인점포와 방식이 같았다. 서울 사당동에 있는 형제슈퍼(나들가게 형제점)는 점원 없이도 24시간 영업을 이런 방식으로 이어가고 있었다. 이 가게는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지원한 ‘스마트슈퍼 육성사업’의 1호 점포다.
스마트 기술 기반의 새로운 동네슈퍼 모델
‘동네슈퍼’라고 불리던 나들가게가 단숨에 ‘무인 스마트슈퍼’로 탈바꿈한 것이다. 나들가게 육성 정책 이후 10여 년 만에 도입되는 ‘스마트슈퍼’는 낮에는 유인으로, 심야에는 무인으로 운영되는 혼합형(하이브리드형) 무인점포다. 무인 출입장비, 무인 계산대, 보안시스템 등 스마트 기술·장비의 도입과 디지털 경영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동네슈퍼 모델이다.
스마트 시스템을 도입한 슈퍼엔 무인 운영시간 동안 매일 손님이 찾아왔다. 사람 없이도 그만큼 매출이 오른 것이다. 이 가게 주인 최제형(60) 씨는 “전국 동네슈퍼를 대표해 스마트슈퍼 1호점을 열게 돼서 기쁘다. 동네슈퍼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해준 정부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아내와 함께 열심히 노력해 주변 기대에 부응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 불편하다고 느낀 적은 없다”며 “좀 더 운영을 해보고 앞으로는 아내와 ‘저녁 있는 삶’도 즐기고, 일요일엔 무인 운영 상태로 해둔 뒤 놀러 가는 일도 생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중기부에 따르면 가맹점(프랜차이즈) 등의 형태가 아닌 동네슈퍼는 전국 5만 2000곳이다. 이들 가게의 평균 운영시간은 16시간 25분(오전 7시 23분~오후 11시 48분). 동네슈퍼는 경영 여건과 삶의 질이 매우 취약한 상태이며 자본력과 정보 부족으로 코로나19 이후 급격히 진행 중인 비대면, 디지털화 등 유통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 대표는 2012년 형제슈퍼를 열었고, 그간 아내 김호경 씨와 함께 오전 9시부터 자정까지 영업을 해왔다. 개점 준비 등을 합치면 하루 16시간 가까이 일을 했던 셈이다. 주로 최 대표 부부가 일을 했고, 아들과 딸 등 온 가족이 슈퍼 일을 도왔다.
‘형제슈퍼’는 8년 넘게 동네슈퍼로 운영하다 10월 15일 ‘스마트슈퍼 1호점’이라는 새 간판을 달았다. 형제슈퍼의 개점 행사장을 찾은 박영선 중기부 장관은 “하루 종일 가족이 돌아가면서 가게를 봐야 하는 형태인 이런 상점에 무인 체계가 갖춰지면, 사장님들이 주말·저녁에 여가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며 “대형 슈퍼마켓과 경쟁도 수월해지기 때문에 소상공인 보호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 소상공인 디지털 전환 정책 모델 제시
박 장관은 스마트슈퍼 1호점 현판식에 이어 무인 출입과 셀프 계산 등 스마트 기술을 시연했다. 김성영 이마트24 대표, 이창우 동작구청장, 임원배 한국슈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장, 최창우 한국나들가게연합회장 등도 참석했다. 이마트24는 시범점포(1·2호점) 구축·운영에 스마트기술 도입과 운영기법을 전수했다. 박 장관은 “스마트슈퍼를 통해 코로나19 확산과 비대면 소비 추세에 대응한 소상공인 디지털 전환 정책 모델을 제시하겠다”며 “4000여 스마트슈퍼 외에 스마트상점 10만 개 보급도 차질 없이 추진해 디지털 시대에 소상공인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기부가 9월 마련한 ‘소상공인 디지털 전환 방안’(2025년까지 스마트상점 10만 개 육성)의 구체적 내용으로 ‘스마트슈퍼 육성 방안’이 국무총리 주재의 경제상황점검회의에서 발표된 바 있다. 중기부는 2020년 말까지 전국 800곳의 스마트슈퍼를 열고, 2025년까지 스마트슈퍼 4000곳을 새롭게 육성한다.
상권 특성과 매장 규모 등에 맞춰 최소 세 가지 점포 모델을 마련해 디지털 기술과 디지털 관리자의 상담 묶음(패키지) 지원을 한다. 묶음 지원은 종합 진단을 시작으로 스마트기술 도입, 스마트점포 경영 교육, 사후관리 등을 지원하는 내용이다. 동네슈퍼의 경우 점주 연령대가 높은 것을 고려해 2020년 말까지 구축되는 5개 시범점포는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운영체계 중심으로 구현할 계획이다.
이어 물류 및 마케팅 스마트화를 통해 새로운 서비스 제공에 나선다. 나들가게 중심으로 활용되고 있는 온라인 상품공급망에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가정 간편식, 지역 먹을거리 등 신규 제품군도 확대한다. 모바일 배송서비스도 신규 도입한다. 2020년 하반기 중 민간 배달앱을 통해 시범 실시한 후 2021년부터 민간·공공 배달앱에 개별 스마트슈퍼를 입점시켜 소비자가 구매하면 단시간에 배송 서비스가 제공된다.
마지막으로 지속가능한 디지털 경영 기반시설(인프라)도 강화한다. 동네슈퍼 점주가 쉽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정기적인 온라인 교육 제공과 함께 스마트슈퍼 모델 점포와 편의점 무인점포 현장 방문 프로그램이 도입된다. 무인점포에서는 구매자 확인이 어려워 판매가 안 되는 제품(담배, 주류)군이 발생하기 때문에 구매자 신분 확인을 위한 대체 기술 개발도 지원에 나설 예정이다. 가게 구조 변경(리모델링)과 무인 운영 장치를 도입하는 데 필요한 돈은 5000만 원까지 연 0.9%의 금리로 빌려준다. 돈이 더 필요하면 최대 1억 원 상당의 보증을 정부가 해주기로 했다.
▶슈퍼를 찾은 고객이 자동계산대에서 구매물품을 계산하고 있다.│한화테크윈
스마트점포 확산 본격화할 듯
최 대표는 중기부 스마트슈퍼 사업에 응모해 1호점이 됐고, 중기부가 800만 원을 지원해줬다. CCTV, 무인계산기, 출입기 등을 설치하는 데는 자기 자금 200만 원을 더해 1000만 원이 들어간 것이다. 물론 인테리어 비용 등 기존의 가게를 철거하고 새로 지으면서 8000만 원을 더 투자했다. 최 대표는 “1억 원 가까이 투자하기까지 아내, 가족과 상의를 많이 했다”며 “일을 하루 종일 할 수도 없고, 심야시간 물건을 팔 수 있다는 점에 결단을 내리게 됐다”고 말했다.
정부는 안면인식 기술 등이 무인 결제시스템에 도입되면 심야시간 성인을 대상으로 술·담배 판매도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2020년 하반기엔 민간 배달앱과 연계한 배송 서비스도 이 같은 동네슈퍼에 도입할 계획이다. 박 장관은 “소상공인 디지털화는 곧 국가 경쟁력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영향에 따른 비대면 소비 트렌드 확산으로 대형 유통과 편의점 업계가 무인점포 확대, 온라인 배송 등 적극 대응 중인 가운데 낮에는 유인, 심야에는 무인점포로 운영하는 동네슈퍼 1호점이 개점되며 스마트점포 확산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화테크윈도 셀프계산대보다 발전된 형태인 자동계산대(ACO)를 개발했다고 이날 발표했다. 손님이 일일이 상품 바코드를 찍을 필요 없이, 컨베이어 벨트에 상품을 올려놓으면 기기가 자동으로 구입 목록과 결제금액을 계산해 보여주는 형식이다. 한화테크윈 등은 무인계산대의 세계시장 규모가 35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연평균 성장률도 9%에 달한다. 이 회사는 “유통업계가 효율적인 매장 운영과 24시간 운영을 확대하려 한다는 점을 고려해 이번 사업 진출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박유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