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원로 신부에게 들은 이야기다. 50년 전, 그는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사목을 위해 소록도에 갔다. 누구도 발을 들여놓지 않으려는 천형의 땅, 잘못된 인식으로 당시 ‘문둥병’이라고 부르며 전염병으로 치부했던 한센병 환자들을 유배시킨 곳. 2007년 타계한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무대가 그들에게는 결코 천국이 될 수 없는 곳.
그는 아무리 주님의 뜻이고 사명이라고 해도 솔직히 두려움을 모두 떨쳐버리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 그의 마음과 머리를 후려쳐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보다 조금 일찍, 그곳에 온 두 명의 20대 외국 여성이었다. 종교적 사명감을 가진 수도자도 아니었다. 간호사로 동양의 한 작은 나라 외딴섬에서 세상에서 버려지고 천대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봉사하는 그들을 보면서 성직자인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했다.
짓무른 상처를 맨손으로 만지며 치료해주고, 음식을 같이 먹는 그들을 그곳 사람들은 ‘천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천사는 다름 아닌 고통과 질병 속에서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한센인들이라고 했다. 천사의 마음을 가지면 그 대상이 어떤 존재이든 천사로 보이고, 괴물의 마음이면 천사도 괴물로 보이는 법인가 보다.
일제 강점과 6·25전쟁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전쟁고아가 넘쳐나고 질병과 가난으로 신음하는 대한민국에 지구촌 곳곳에서 많은 천사가 왔다. 그들은 평생 봉사와 희생으로 이국땅에 사랑을 심고 희망과 용기를 선물했다. 어떤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았고, 자신의 존재조차 드러내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한 줌의 사랑이라도 더 주기 위해 노력했다.
▶ 애환의 섬 ‘소록도’에서 사랑과 헌신을 실천한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삶을 조명한 휴먼다큐 영화 ‘마리안느와 마가렛’ 포스터. ⓒ사단법인 마리안마가렛, 기린제작사
그들은 하나같이 병들고 힘든 자들을 위한 봉사가 가장 큰 소망이었고 기쁨이었다고 말했다. 그런 ‘천사’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은 조금씩 건강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워졌다. 오스트리아 출신 간호사 마리안느 스퇴거(83)와 마가렛 피사렉(82)도 바로 그런 천사들이었다. 둘은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간호학교 동창생이다.
마리안느가 소록도를 찾은 것은 1962년. 4년 뒤에 마가렛이 합류했다. 처음에는 5년만 봉사하고 돌아가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움의 손길이 아직 필요한 아픈 환자들과 그들의 건강한 아이들의 눈빛을 뿌리치고 돌아설 수 없었고 5년이 43년이 됐다. 그렇게 두 사람은 소록도에서 한센인들의 친구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되었다.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함께 밥을 먹고 새벽마다 병실을 찾아 따뜻한 우유를 나눠주고, 생일이면 기숙사에 초대해 직접 빵을 구워주었다.
정부의 지원이 부족하자 고국의 지인들과 봉사단체에 도움을 요청해 영아원도 만들고 결핵병동과 정신병동, 목욕탕까지 지어주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죽은 환자들의 옷을 수선해 입을 정도로 청빈한 생활을 실천한 그들이지만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두 사람. 가톨릭 평신도 재속회원이지만 어찌 이들을 ‘수녀’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알지 못했다. 그들이 2005년 11월, 조용히 가방 하나 들고 섬을 떠난 것도 70세의 고령에 건강이 악화되자 주변에 부담을 주기 싫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에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대단히 감사드린다”는 작별인사를 한 사실을. 빈손으로 돌아간 두 사람이 오스트리아 정부가 주는 최저 수준의 국가연금만으로 생활하면서 대장암과 치매로 투병생활을 하고 있으며, 이 소식을 듣고 천주교 광주대교구와 소록도성당이 지원을 제안해도 모두 사양했다는 사실을.
천사란 저 먼 하늘, 만나지 못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곁에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떠났다. 우리는 그것조차 무심히 지나치거나 모르고 있었다. 이를 꾸짖기라도 하듯 늦게나마 소록도 1세기를 기념해 올해 2월에 출간된 <소록도의 마리안느와 마가렛>과 이어 4월에 나온 다큐멘터리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우리에게 이 두 ‘할매 천사’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책과 영화(다큐멘터리)는 요란하지 않다. 낡은 사진과 솔직한 고백과 과장하지 않은 증언으로 두 천사의 겸손하고 소박하고 따뜻한 모습을 담았다. 한센병 환자들을 스스럼없이 껴안고, 마치 자식처럼 그들의 아이들 볼에 입을 맞추는 두 천사의 모습에서 진정한 이웃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다. 단지 환자들과 제일 좋은 친구로 살았다고. “제가 하는 일 중 특별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면서 “그저 부름에 따라 온 일을 세상에 알릴 필요가 없다”는 말에서 세상을 울리는 봉사의 자세를 배운다. 그들이 떠난 후, 석 달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엄마 잃은 고통’에 울었다는 어느 노부부 환자의 이야기가 과장은 아닐 것이다.
늘 그렇듯, 우리는 이런 천사들을 책이나 영화로 만날 때마다 선물을 받는다. 새삼 자신을 돌아보고 확인하는 거울이 바로 그것이다. 세상은 왜 살 만한지도 알게 된다. 공무원 가족들을 위해 정부세종청사에서 상영한 ‘마리안느와 마가렛’을 보고 이낙연 국무총리가 “이 영화가 주는 최고의 선물은 나의 내면에 있는 이타심의 DNA가 숨 쉬고 있었구나 하는 자각을 주는 것”이라고 한 것도 이런 연유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미 그 자각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국립소록도병원에서 두 천사와 근무한 약사 강경애(58) 씨와 간호사 최연정(44) 씨가 그랬다. 그들은 에티오피아와 네팔 등을 오가며 에이즈 및 나병환자들을 간호하고, 볼리비아에서 빈민구호 활동에 헌신하고 있다. 소록도성당의 김연준 주임신부는 ‘사단법인 마리안마가렛’을 만들어 반세기 전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도움이 필요한 나라를 지원하고 있다. 두 사람은 떠났지만, 그들의 마음과 손길은 이 땅에서 새로운 싹을 틔웠다.
이 두 천사야말로 ‘마더 테레사’ 수녀를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수녀가 아닌 평범한 간호사로, 그것도 누구도 선뜻 다가가지 않으려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평생 이국의 외딴 섬에서 사랑과 봉사, 인권과 평화를 실천하였기에 이들의 존재를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만이 아닌, 지구촌 모두가.
그래서 기념관도 짓고, 해외에서 그들의 다큐멘터리 상영도 하고 있다. 정부가 이들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해 전 세계에 인권과 자원봉사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물론 이 두 아름다운 천사는 이 같은 우리 국민의 마음과 감사의 보답, 자신들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민망하다. 그 모습이 더 아름다워 더욱 그러고 싶다.
이대현│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