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이른 무더위가 찾아온 5월의 마지막 날. 호국보훈의 달을 하루 앞두고 6•25 참전 유엔군 전사자들의 유해가 안장된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찾아갔다. 언제 그랬냐는 듯 평화로운 햇살만 가득한 공원묘지에는 조국으로 이장되지 않은 2300기의 유엔군 전몰장병들이 잠들어 있다.
이날 기자가 부산에 간 이유는 유엔기념공원 국제협력실장으로 근무하는 레오 드메이(Leo G. Demay, 64) 씨를 만나기 위해서다. 캐나다인 전몰장병 앙드레 레짐발드(Andre A. Regimbald)의 아들인 드메이 씨는 2007년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태어나자마자 입양된 그는 2006년 친모를 만나 전몰장병인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됐고, 이듬해 아버지가 안장된 부산으로 건너와 아버지 곁에서 남은 삶을 보내고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 뒤에야 저를 임신한 사실을 아셨어요. 이후 저는 입양되어 자랐고, 수십 년 뒤 어머니를 만나기 전까지 제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했죠. 아버지가 6•25전쟁에 참전한 전몰장병이란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들었어요. 아버지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었고, 다행히도 아버지를 알고 계신 생존해 있는 참전 군인들을 만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죠.”
뒤늦게 알게 된 아버지의 존재, 참전용사로서의 희생은 그로 하여금 어떤 자부심을 갖게 만들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전우들은 그들이 해야 마땅한 일들을 하셨어요. 그들은 침략당한 한 나라를 구했고, 한국이 자유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왔죠. 그들 모두가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2007년 드메이 씨는 뒤늦게 찾은 아버지의 묘 앞에서 오랫동안 전하지 못한 가족들의 안부를 전했다.
“마침내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대되고 기뻤어요. 아버지를 만나면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그동안 잘 지내셨느냐’는 안부 인사였죠. 그날 아버지의 묘지 앞에서 저는 결심했어요. 남은 삶은 꼭 아버지 곁에서 보내겠다고요.”
가족을 남겨둔 채 홀로 떠나온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이 길을 택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
▶ 6·25전쟁 중 전사한 유엔군 전몰장병의 아들 레오 드메이 씨는 2007년 한국으로 건너와 현재 유엔기념공원 국제협력실장을 맡고 있다.
기사로 접한 이복 형과 60년 만에 상봉
“전쟁으로 상처받은 가족 헤아릴 수 없어… 반복되면 안 돼”
그런 드메이 씨가 또 한 번 기적적인 사건을 맞이한 건 지난 2013년. 그 무렵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한 캐나다 일간 ‘오타와 시티즌’의 한 기자가 드메이 씨의 사연을 보도하면서 그의 이복형 앙드레 브리즈부아(Andre Brisebois) 씨가 드메이 씨에게 먼저 연락을 취해왔다. 아버지가 전몰장병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이복 형은 사연 속 주인공이 자신의 이복 동생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았다.
“존재조차 몰랐던 우리가 기사를 통해 서로를 알게 됐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어요. 우리는 전화나 스카이프(무료 영상통화 앱)를 통해 그동안 못 다한 이야기들을 나눴고, 이후 한국 국가보훈처의 초청으로 형이 한국에 오면서 드디어 만날 수 있었죠.”
국가보훈처는 정전 50주년인 2003년 ‘유엔기념공원 안장자 유족 초청행사’를 마련해 지금까지 실시해오고 있다. 이 행사는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11개국 2300명의 전사자 유족 중 한국 방문 경험이 없는 유족을 초청해 유엔묘지를 참배하고 한국의 문화유산과 발전상을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2013년에는 드메이 씨의 형 브리즈부아 씨가 그중 한 명으로 초대받았다.
“많은 한국인들이 전쟁의 영향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아마도 전쟁으로 죽고 상처받고 정신적으로 피해받은 군인들에게는 부모와 아내, 자식, 조카, 삼촌 등 많은 가족이 있기 때문이겠죠. 그들의 친구들까지 포함한다면 전쟁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거예요. 저 역시 전쟁 때 부모를 잃었고 형제를 모른 채 살았어요. 이런 전쟁의 아픔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재 드메이 씨는 유엔기념공원 국제협력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유엔기념공원에 근무하던 외국인 직원이 갑작스러운 질병을 얻으면서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됐다.
“주로 참전국 대사관 및 위원회의 외국인 직원들과 소통하는 일들을 하고 있어요. 관계자들이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하면 안내를 맡기도 하고, 위원회에서 요구하는 각종 영어 자료를 작성하기도 해요. 무엇보다 이 일을 하며 보람을 느끼는 건 아버지 곁에서 일한다는 사실이에요. 아버지를 포함한 많은 전사자들 곁에서 그들을 기리며 일하는 건 정말 행운이고 특별한 기회죠.”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하는 외국인 유가족의 수는 1년에 약 30명 남짓. 많지 않은 숫자라 그런지 드메이 씨는 그들 한 명 한 명이 다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누구 한 명을 콕 집어서 말할 수 없을 만큼 다들 가슴 아픈 사연을 갖고 계세요. 한번은 한 전사자의 누이께서 전쟁 당시 동생과 주고받은 편지들, 그리고 동생의 전사 소식을 전하는 전보를 보내주셨어요. (기념관에 전시된 해당 전보를 가리키며) 이 전보를 볼 때면 가슴이 아픕니다. 저희 할머니 역시 이런 전보를 받으셨을 테니까요.”
올해로 부산 생활 9년째에 접어든 드메이 씨. 그는 매일 아침 기일을 맞은 전사자의 무덤에 찾아가 전사자의 이름을 크게 불러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뼈 있는 말을 남겼다.
“몇 년 전 서울에서 6•25 참전국이 어딘지 묻는 길거리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어요. 그때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심지어 그 국가들은 지금까지도 한국과 동맹국으로 남아 있는데 말이죠. 한국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싸운 참전국과 전사자들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어요.”
유엔기념공원은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 세계 평화와 자유를 위해 생명을 바친 유엔군 전몰장병들이 잠들어 있다. 6•25전쟁이 일어난 이듬해인 1951년 1월 전사자 매장을 위해 유엔군 사령부가 조성했고, 그해 4월 묘지가 완공됨에 따라 개성, 인천, 대전, 대구, 밀양, 마산 등지에 가매장돼 있던 유엔군 전몰장병들의 유해가 차례로 이송돼 안장됐다. 이후 일부 유해는 그들의 조국으로 이장됐고, 현재는 유엔군 부대에 파견 중 전사한 한국군 36명을 포함해 11개국 2300구의 유해가 잠들어 있다.
▶ 부산 대연동에 위치한 유엔기념공원에는 6·25전쟁 중 전사한 유엔군 전몰장병들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유엔은 1950년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하자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국제연합군을 파병했다. 이는 유엔군의 이름으로 세계 분쟁지역에 파병한 유일한 사례다.
1955년 11월 한국은 유엔군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이곳 토지를 유엔에 영구히 기증했다. 이에 따라 1959년 11월 유엔과 한국 간에 ‘유엔기념묘지 설치 및 관리•유지를 위한 대한민국과 유엔 간의 협정’이 체결됐고 지금의 재한유엔기념공원(UNMCK : 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 in Korea)이 탄생했다.
글 · 김가영 (위클리 공감 기자) / 사진 · 조영철 기자 2016.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