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4년이 지났지만 김택중(35) 씨는 아직도 해마다 6월이면 마음 한편이 저려온다고 말한다. 그에게 6월 29일은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 하는 날이다.
전북 고창교육지원청에서 근무하는 김 씨는 제2차 연평해전 참전용사다. 한•일월드컵 열기가 뜨겁던 2002년 6월 29일, 북한 경비정 2척이 서해를 지키고 있던 우리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를 기습하는 도발을 자행했다. 이 과정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우리 해군 장병 6명이 전사하고, 21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겉으로 보면 당시 부상이 완전히 아문 것처럼 보이지만 그 후유증은 현재진행형이다.
“전투 당시 파편을 맞아 팔, 허리, 엉덩이, 다리 등을 다쳤습니다. 사건 직후 수술로 파편 10개를 제거했고, 2011년에 추가로 한 개를 더 제거했죠. 아직 4개가 더 남아 있는데, 자칫하면 신경을 건드릴 위험이 커 제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파편의 영향 때문인지, 수술 후유증 때문인지 조금 오래 서 있거나 걸으면 다리가 저리고 쉽게 피곤해집니다. 일상생활만 가능한 정도죠.”
▶ 제2연평해전에서 부상을 당한 김택중 씨는 “국민 성금으로 연평해전이 영화로 만들어져 고맙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그는 원래 거친 공사 현장을 누비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부상 후유증으로 그 꿈을 포기하고 2006년부터 전라북도 교육행정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일부러 행정직을 택했지만 그마저도 힘이 달려 휴직을 신청한 적도 있다고 한다.
김 씨는 어려서부터 해군을 동경해 2001년 11월 자원입대했다. 신병 훈련을 마치고 배치받은 곳이 참수리 357호. 2002년 5월부터 승선했는데 당시 제가 막내 병사였다.
“원래는 그날 제가 식사 당번이어서 연평도 기지에 남아 있어야 했어요. 그런데 곧 전역할 선임병을 대신해 일을 배우러 함정에 올랐죠. 서해 북방한계선(NLL) 부근은 북한 함정의 출몰 등으로 하루에도 서너 번씩 긴급 출동 명령이 떨어집니다. 그날도 북한 함정이 우리 해역으로 넘어오려 해 출동한 거죠.”
김 씨는 그때까지 몇 번 작전을 나간 적은 있지만, 북한군 배를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고참들이 ‘다른 때와는 분위기가 좀 다르다’는 말을 하더군요. 대개는 NLL을 침범했더라도 멀찍이서 대치하다 스스로 뱃머리를 돌려 북으로 돌아가곤 했는데, 이번엔 점점 가까워지는 게 이상하다는 거였어요. 나중엔 총을 든 북한 병사 얼굴이 또렷이 보일 만큼 가까워졌죠.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하늘에서 (포탄) 불꽃이 쏟아졌어요. 전쟁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죠. 정신을 차릴 수 없었어요.”
참수리 357호 선체 위로 포탄이 마구 날아왔고, 수류탄 상자에서는 화염이 피어올랐다. 정신을 못 차리다 선임병의 “빨리 소화기 찾아와, 소화기!”라는 고함에 겨우 정신을 차린 김 씨는 바로 선체 내부로 달렸다. 배 안은 연기로 가득 차 있었고, 바닥에선 핏물이 출렁거렸다.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해병들은 대응사격을 하는 등 북한의 도발에 맞서느라 사력을 다했다. 순간 뜨거운 느낌이 온몸을 짓눌렀다. 포탄을 맞아 부서진 선체 파편이 그의 몸을 뚫고 들어온 것. 30분도 안 돼 전우 6명이 목숨을 잃었고 함선은 침몰했다.
김 씨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다른 생존자들과 마찬가지로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트라우마)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던 시절, 생존자들은 그날의 기억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쳐야만 했다.
“처음엔 많이 힘들었어요. 의가사제대 조건이 안 된다고 해서 계속 근무를 했는데, 배를 타지는 않았지만 차를 타고 가다가도 갑자기 극한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곤 했죠.”
김 씨는 국군 수도병원에서 10여 일을 보내고 평택 의무대로 옮겨진 뒤 어이없는 훈련에 동원된 적도 있다고 했다. 제2연평해전을 계기로 의무대에서 ‘부상자 치료 훈련’이 새로 생겼는데 ‘진짜 부상자’였던 그가 동원된 것.
“저도 처음엔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부상자 역할을 하고 있자니 못 참겠더라고요.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걸 보고 놀란 의무대장이 그제야 저를 훈련에서 빼더군요.”
▶ 영화 ‘연평해전’은 제2연평해전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화제를 모았다. 사진은 영화의 한 장면.
몸에 박힌 파편보다 더 아팠던 건 세상이 준 상처
군인, 경찰, 소방대원 등에 대한 외상 후 스트레스 치료 절실
몸에 박힌 파편보다 마음에 박힌 파편이 그를 더 아프게 했다. 잘못된 사회의 인식들이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당시 월드컵 때문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어요. 월드컵이 끝난 후에는 우리 일이 남북 화해 분위기를 깨뜨리는 것처럼 돼 오히려 우리가 죄인 취급을 받았고요. 섭섭했죠.”
그나마 2008년부터 서해교전에서 제2연평해전으로 격상돼 정부 행사로 치러지면서 조금은 위안이 됐다고 한다. 또한 제2연평해전을 다룬 영화 ‘연평해전’이 국민 성금으로 제작된 게 무척 고맙다고 했다. 영화 ‘연평해전’은 지난해 개봉해 600만 명 이상이 관람했다.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해줘서 고맙고, 국민들이 많이 봐줘서 고맙죠.”
지금은 직장인으로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김 씨는 가끔 ‘또 다시 그런 일(연평해전)을 겪는다면?’이라고 생각해 보곤 한다.
“도망갈 수도 있겠지만 옆에서 함께 동고동락한 전우가 피를 흘리는데 그럴 순 없을 것 같아요. 더구나 제복을 입었으면 그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연평해전은 김 씨의 몸에 장애를 남겼지만 가슴 속엔 자부심을 남겼다.
“뭘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한 일이니까 특별히 바라거나 기대하는 건 없어요. 저뿐 아니라 우리 장병들은 조국을 지켜냈다는 자부심으로 깊은 상처와 장애도 훈장으로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잊지 않고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를 기억해달라는 게 아니라,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이 있다는 그 사실 자체는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국민과 정부로부터 그 자체를 외면받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에요.”
그는 정부에 한 가지 바람이 있다고 했다.
“우리 때만 해도 외상 후 스트레스라는 것 자체를 몰랐죠. 그래서 개인이 스스로 견뎌내야 했어요. 지금은 그 고통과 심각성이 잘 알려져 있잖아요. 군인, 경찰, 소방대원 등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다 외상 후 스트레스를 겪는 분들이 지금도 많아요. 이분들의 치료에 좀 더 체계적인 지원을 해줬으면 합니다.”
글 · 최호열 (위클리 공감 기자) / 사진 · 지호영 기자 2016.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