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8일 오후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석화리의 자택에서 우광혁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와 딸 우가영 씨가 ‘어린이용 손 피리’를 함께 연주하고 있다.
소상공인 긴급대출로 사업재개한 우가영 씨
요구르트병처럼 생긴 작은 통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입으로 불자 음악이 흘러나왔다. 손바닥의 움직임에 따라 음의 높이가 달라졌고, 통을 흔들자 바이브레이션 기교까지 가능했다. 7월 8일 오후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석화리의 한 전원주택에서 시작된 아버지와 딸의 연주는 ‘봄처녀’ ‘어머니의 마음’ 등 가곡을 거쳐 ‘스와니강’ 등 미국 민요까지 이어졌다. 악기는 아버지 우광혁 씨가 발명해 최근 특허까지 받은 ‘어린이용 손 피리’였다. “리코더의 구멍을 손가락으로 막았다가 열듯 손 피리의 구멍을 손바닥으로 막으면 낮은음이 나고 열어주면 높은음이 납니다. 도레미 계이름을 몰라도, 악보를 못 봐도 휘파람을 불 수 있는 것처럼 손바닥의 느낌만으로 연주할 수 있어요.”
▶파이프가 한 줄로 이어진 팬플루트와 달리 피아노 건반처럼 반음 파이프를 위 줄에 배열한 우플루트
손가락 없는 친구 위해 ‘손 피리’ 발명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음악 담당 교수인 그가 이 악기를 발명한 건 손가락이 없는 친구를 위해서다. 젊을 때 기타를 즐겨 쳤지만, 공장에서 선반 기계를 다루다 네 손가락을 잃은 뒤 연주를 포기한 친구를 위해 손바닥만으로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발명한 것이다. 우광혁 교수는 10년 전 팬플루트를 변형한 ‘우플루트’를 개발하기도 했다. 파이프가 한 줄로 이어진 팬플루트와 달리 피아노 건반처럼 반음 파이프를 윗줄에 배열한 우플루트는 주법을 쉽게 익힐 수 있고, 플라스틱 재질이라 대나무로 만드는 팬플루트보다 훨씬 저렴하다. 우 교수는 이렇게 직접 발명한 악기 등으로 ‘세계 악기 여행’이라는 강연 콘서트를 하며 놀이를 통해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음악성을 향상하는 교육법(우 메소드)을 전파하고 있다.
딸 우가영(32) 씨는 “10여 년 전 아버지가 공연할 때 스태프로 따라가서 보면, 우플루트에 대한 교사들의 관심이 대단했고 단체 주문도 많이 들어왔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우플루트를 가족이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드느라 60개 주문을 소화하려면 60시간이 넘게 걸렸다. 2010년 가영 씨는 대학을 중퇴하고 우플루트 보급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었다. “공장에서 균일하게 제품을 생산한다면 대량 판매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어요. 사회가 대학 중퇴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몰라 겁이 없었던 거죠.”
새로운 악기의 대량 생산은 쉽지 않았고, 아버지와 달리 검증되지 않은 가영 씨가 인맥 없이 영업하기는 힘들었다. 2년 넘게 시행착오를 겪으며 사회의 벽을 절감한 그는 다시 대학에 진학했지만, 정신과 육체 모두 지친 탓인지 수술을 두 번이나 받으며 6년 만인 2020년 2월에야 졸업할 수 있었다.
▶우광혁 교수가 발명한 손 피리의 구조와 연주 방법│우광혁
코로나19로 공연 끊기면서 손발 다 묶여
대학을 다니는 내내 10년 전 실패를 곱씹었던 가영 씨는 졸업과 동시에 ‘어린이용 손 피리’로 다시 한번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초등학교 등에서 공연을 하며 손 피리를 교보재로 납품할 계획을 세우고 2019년 말 사업자(우플루트 제작·보급협회) 등록을 했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졸업하면 본격적으로 공연할 계획이었는데 코로나19로 공연이 뚝 끊기면서 매출은 아예 없고 손발이 다 묶여버린 상태라 어떤 것도 진행할 수 없게 된 거죠.”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정부에서 ‘소상공인 1000만 원 긴급대출’을 시행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보통 정책자금 지원할 때 저는 어디에도 끼지 못해요. 소상공인은 소규모 식당 같은 자영업자만 되고, 스타트업은 말 그대로 시작하는 기업인데 첨단 기술을 요구하고, 그렇다고 제조업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기존에 비슷한 산업군도 없으니 사각지대 중의 사각지대더라고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4월 초 서울 서초구에 있는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서울남부센터를 방문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상공인들이 대출을 받기 위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다들 절박하다 보니 큰 소리가 나기도 하고, 사업 규모가 커서 소상공인 자격이 안 된 이는 ‘나도 힘든데 왜 안 되냐’며 화를 냈어요. 마치 병원 응급실에 온 것처럼 전쟁터 같은 풍경이었지요.”
가영 씨는 담당자에게 필수 구비 서류는 물론, 수기로 작성한 사업계획서와 아버지와 함께 공연한 사진들도 제출했다. 서류를 꼼꼼히 확인하던 담당자는 “악기를 개발한 아버지가 한예종 교수인가 봐요?”라고 물었다. 사진 속 현수막에 ‘한국예술종합학교’라고 적힌 걸 본 것이다. 그렇다고 하자 “이 자금은 코로나19로 정말 힘든 소상공인들에게 드리는 자금”이라며 서류를 반려하려고 했다.
▶7월 8일 자택에서 우광혁 교수와 딸 우가영 씨가 ‘어린이용 손 피리’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우가영 씨는 손 피리의 탄생에 얽힌 아버지와 친구분 사연을 담은 그림 동화책의 줄거리판을 들고 있다.
소상공인 긴급대출 덕에 사업 방향 전환
“당신이 무슨 도움이 필요하냐는 식으로 서류를 돌려주는데 갑자기 울컥했어요. ‘아버지가 대학교수라고 해서 제 상황이 절박하지 않은 건 아니거든요. 학교를 6년 다니면서 수술비까지 여기저기 대출도 많이 받았는데, 스태프로 참여한 아버지 공연까지 모두 중단되면서 저는 수입이 전혀 없어요.’ 그 말을 안 하고 돌아설 수가 없었어요.” 그의 말에서 절박함이 묻어났는지 담당자는 서류를 다시 받아주면서 특허결정서와 특허권자와의 계약서 등을 추가로 제출하라고 했다. 이틀 뒤에는 준비 상황을 묻는 전화까지 왔다. “마지막에 서류를 받아주긴 했어도 ‘나는 안 되나 보다’ 싶어 사실 주눅 들어 있었거든요. 그런데 전화까지 해서 늦깎이 졸업생을 챙겨주니 정말 감동이었어요.”
추가 서류를 접수하자 일주일 만에 1000만 원이 입금됐다. 가영 씨는 이 자금으로 학교가 아닌 가정으로 사업 방향을 전환했다. 코로나19로 어려워진 공연 대신, 손 피리의 탄생에 얽힌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의 사연을 담은 그림 동화책과 손 피리를 한 묶음으로 판매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한윤리’라는 출판사도 5월 말 등록했다. “동화책은 읽어주는 부모님이나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초점을 맞췄어요. 책을 다 읽어준 뒤 아이들에게 ‘여러분도 손 피리를 연습해 주변의 안타까운 친구들을 위해 위로의 연주를 하면 어떨까요’라고 하는 거죠.”
열흘 전부터 작업에 들어간 그림 동화책의 줄거리판에는 직접 스케치한 그림이 빼곡했다. 마지막으로 가영 씨는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서울남부센터 담당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 코로나19로 정신적·경제적 피해를 받은 소상공인한테는 코로나19 최전방에서 애쓰고 있는 의료진뿐 아니라 선생님도 영웅입니다. 제가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도록 정말 잘해 보겠습니다.”
글·사진 원낙연 기자
3차 추경으로 소상공인 101만 명 추가 혜택
우가영 씨가 지원받은 ‘소상공인 1000만 원 긴급대출’은 정부가 4월 1일부터 시행한 ‘소상공인 1단계 지원 프로그램’의 하나였다. 신용등급 4등급 이하 저신용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은행과 보증기관을 거치지 않고 신용만으로 대출이 이뤄졌다. 대출 기간은 5년(2년 거치 3년 상환), 대출금리는 1.5%를 적용했다. ‘소상공인 1000만 원 긴급대출’뿐 아니라 ‘영세 중소기업·소상공인 전액보증’ ‘기업은행 초저금리 대출 협약보증’ 등이 본격 공급된 ‘소상공인 1단계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소상공인진흥기금 대출 2조 7000억 원, 기업은행 대출 5조 8000억 원, 고신용자(1~3등급) 대상 시중은행 대출 3조 5000억 원 등 모두 12조 원이 지원됐다. 정부는 내수경기 부진으로 소상공인의 대출 수요가 계속 늘어나자 초저금리 긴급경영자금 대출에 예비비 4조 4000억 원을 더 투입해 1단계 대출 규모를 12조 원에서 16조 4000억 원으로 늘렸다.
7월 3일 국회를 통과한 35조 1000억 원 규모의 3차 추가경정예산(추경)으로 ‘소상공인 2단계 지원 프로그램’이 이뤄진다. 코로나19로 매출이 줄어든 소상공인 100만 명에게 1인당 1000만 원씩 모두 10조 원 규모의 자금을 공급하기 위해 정부는 신용보증기금에 4600억 원을 출연하게 된다. 이는 소상공인 정책자금 지원 확대로 건전성을 위협받는 16개 지역신용보증재단에 기본재산을 출연, 지역 소상공인에게 안정적으로 보증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밖에 코로나19로 매출이 감소한 장애인 2000명, 청년 3000명에게 소상공인 대상 경영안정자금 융자를 1인당 1000만 원씩 지원한다. 코로나19로 불가피하게 폐업한 소상공인의 폐업정리 상담 및 점포 철거비(개소당 200만 원)도 5000명에게 지원한다. 3차 추경으로 혜택을 받게 될 소상공인은 모두 101만 명에 이를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