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섬진강 강가에 있는 김용택 시인의 작업실. 수많은 책들이 자연스럽게 쌓여 있다.
▶서울 종로에 있는 김정수 화가의 작업실. 진달래꽃이 푸짐하게 담긴 바구니는 향수를 자극한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진달래 화가 김정수
한국적 감성 승화하는 두 사람
시인에겐 마른 풀잎이고
화가에겐 연분홍 진달래다
“마른 풀잎이었습니다.”
하필 마른 풀잎이다. 그 수많은 풀잎 가운데 햇빛에 시들어가는 마른 풀잎. ‘섬진강 시인’ 김용택(71)이 어머니의 사랑을 이리 표현한다.
“저는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입니다.” 봄날 뒷산에 만개한 연분홍빛 진달래. ‘진달래 화가’김정수(63)의 어머니 이미지이다.
한국적 감성을 시와 그림으로 표현하는 대표적인 시인과 화가의 대화는 ‘어머니’로 시작됐다. 차가운 강바람이 살 속으로 파고드는 겨울의 한복판, 섬진강 중류의 강가에 자리 잡은 김용택 시인의 작업실은 커다란 유리창을 통과한 따스한 햇살로 가득 찼다. 포근하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들이 두 예술가의 ‘수다’를 숨죽여 듣는다. 김 화가는 평소 김 시인의 열혈 팬이다. 김 시인 역시 김 화가의 열혈 팬이다. 두 예술가는 지난해부터 때때로 만나며 예술혼을 나누는 사이이다.
“무작정 도시로 나가기로 작정했습니다. 오리를 키우다가 망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집에서 오리를 키웠는데, 사룟값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포기했어요. 검정 고무신에 철 지난 잠바를 걸치고 춥고 매서운 강바람을 맞으며 집을 나섰어요. 눈물이 나더군요. “
90살을 넘은 김 시인의 어머니는 지금 병상에 누워 계신다.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가 달려오고 계셨어요. 어머니는 나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줬어요. 참으로 까칠한 손이었어요. 2000원이었어요. 어머니는 울먹이시면서 ‘용택아, 어디 가든지 밥 잘 먹고 건강혀야 한다. 꼭 편지하고, 알았자.’ 나는 돌아서서 뛰었어요. 얼마를 뛰다가 길모퉁이에서 뒤를 돌아봤어요. 그때까지 어머니는 서서 손을 흔들고 계셨어요. 마른 풀잎 같은 손길이었어요.”
▶따뜻한 햇살이 비추는 김 시인의 작업실 창가에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나누고 있다.
“그 어떤 시인보다 멋진 시어로 말씀”
창밖으로 강이 보인다. 그 강가를 배경으로 눈물의 이별을 했던 어머니의 아들을 향한 애틋함이 수십 년의 시간을 거슬러 눈앞에서 선명하게 재현되는 듯하다. 듣는 이가 먹먹해진다.
“저도 가출을 했어요. 문제아였지요. 가고 싶은 중학교에 재수를 하고도 떨어졌어요.” 고향이 부산인 김 화백의 가출은 현실도피였다.
“첫해는 몸이 약해 체력장에서 실패했기에 운동을 열심히 해서 다시 도전했는데 또 실패했어요. 방황이 시작됐어요.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싸우기도 했고…. 급기야 가출까지. 부모님은 가출한 나를 찾기 위해 신문에 광고를 냈어요. 어머니가 위독하니 급히 귀가하라는 광고를. 그 광고를 친구 어머니가 보고 나를 설득했어요. 귀가하니 어머니는 화를 내지 않으시고 나의 손을 잡고 뒷산에 올라갔어요. 손길이 부드러웠어요. 마침 산에는 분홍색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어요. 어머니는 한참 꽃을 바라보시더니 조용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 했어요. ‘수야! 조급하게 마음먹지 마라. 때가 되면 꽃은 이렇게 활짝 핀단다.’ 순간 어머니가 다시 보였어요. 그 어떤 시인보다 멋진 시어를 말씀하셨고, 어떤 여배우보다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깊은 후회와 함께 깨달음이 왔어요. 그래, 조금씩 준비하고 노력하고 기다리자. 때가 되면 기회는 올 거야.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했어요.”
▶김용택 시인의 집 앞에 있는 500년된 느티나무 아래서 김 시인이 마을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수업료 못내 쫓겨나자 닭 팔아 쥐어줘”
김 시인이 말을 이어받는다. “정말 가난한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중학교 때입니다. 수업료를 내지 못했어요. 교문 앞 게시판에 수업료 안 낸 학생들의 명단이 붙은 지 3일째. 그날은 학교 가자마자 집으로 가라고 했어요. 차비가 없어 16㎞나 되는 자갈길을 걸어가야 했지요. 하얀 자갈길은 불볕이 이글거리고, 팍팍하기만 했어요.” 아! 가난이 죄인 시절, 공부를 안 시키고 ‘돈’을 가져오라고 집으로 돌려보내던 시절…. 하지만 시인은 땀을 흘리며 집으로 1시간 반을 걸어 보리밭을 메고 계시던 부모님과 만난다.
“어머니가 놀란 표정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요.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가자!’ 하며 머리에 쓴 수건을 벗고 밭을 걸어 나가셨어요. 따라갔어요. 집에 들어선 어머니는 보리를 한 줌 들고 마당에 놀던 닭들에게 뿌리며 닭장으로 유인하셨어요. 그리고 망태에 몇 마리를 잡아 담고 ‘가자!’ 하시며 한시간반을 걸어서 인근 장이 선 곳으로 갔어요. 금방 닭은 팔리고, 어머니는 닭을 판 돈 모두 나에게 주셨어요. 밀린 수업료와 학교까지 갈 차비.” 누구보다 강한 이 땅의 어머니이다.
“아마 3000원이었어요. 어머니가 닭을 팔아 준 돈이. ‘어매는 어치게 헐라고?’ ‘나는 걸어 갈란다. 차 간다. 어서 가라.’ 가슴이 꽉 메어왔어요. 나는 돈을 꼭 쥔 채 차를 탔고, 어머니는 뙤약볕 속의 자갈길을 걸어 가시고. 버스가 어머니 곁을 먼지를 내며 스쳐 지나갈 때 어머니는 나를 바라보셨어요. 눈물이 앞을 가렸어요. 앞 의자 뒤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어요. 점심도 굶은 어머니는 두 시간 이상을 걸어가셔야 했어요. 고개를 뒤로 돌렸어요. 버스 뒤 유리로 자갈길을 걸어가시는 어머니가 보였어요. 뽀얀 먼지 속에서 자갈을 잘못 디뎠는지 어머니가 순간 비틀거렸어요.”
강가 길에 버스가 지나간다. 먼지가 인다. 그 먼지를 배경으로 비틀거리셨던 김 시인의 어머니가 투영된다. 가난과 싸우며 묵묵히 가족을 먹여 살리신 우리의 어머니들.
김 시인의 어머니 이야기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분위기를 바꿔야 했다. 김 화백에게 물었다. “왜 진달래를 그렸나요?” 진달래만 그린 지 25년째. 김 화백의 진달래 그림은 지금 가장 ‘핫’하다. 그림을 달라고 화상들이 줄을 선다.
▶서로가 서로의 열혈 팬인 시인과 화가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파안대소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다 ‘애모’에 소름”
“홍익대 미대를 다니다가 프랑스로 유학, 영주권을 받아 그곳에서 화가로 생활했어요. 반은 한국인, 반은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지요. 그런 나를, 한국인일 수밖에 없다고 가슴 깊이 새겨준 것은 다름 아닌 유행가였어요. 전시회 때문에 일시 귀국해 종로 거리를 걷고 있는데 레코드 가게에서 당시 유행하던 김수희의 ‘애모’라는 노래를 처음 들었어요. 애절한 전주에 이은 첫 소절 가사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를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아! 나는 한국인이구나’라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어요. 그때 세계적인 작가가 되려는 생각을 접고, 가장 한국적인 작가가 되기로 작정한 거죠. 당시 나의 멘토였던 백남준 선생님의 조언을 뒤로하고 귀국했어요. 그러고는 가장 한국적인 것을 찾기 시작했어요. 우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골랐어요. 그것은 바로 자연이었어요. 자연 중에서도 돌도, 나무도 아닌 꽃이었어요. 꽃 중에서도 자연에 핀 야생화. 수많은 한국 문학가의 소설과 시를 읽었어요.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이 바로 진달래였어요. 그런 진달래는 곧 어머니 이미지와 연결됐고, 그래서 진달래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문득 봄날 산에 오르면 친숙하게 우리를 맞아주던 진달래가 생생히 떠오른다. 꽃잎이 햇살에 투명하게 비치고, 꽃잎을 따서 입에 넣고 우물거리곤 하던 진달래. 그래서 다시 물었다. “이 땅의 어머니들에게 진달래는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시나요?”
“처음 진달래꽃을 그렸을 때 부제를 이렇게 붙였어요. ‘이 땅의 어머니들을 위해서’. 가부장적인 숨 막히는 집안 분위기, 한국전쟁, 가난 등 우리 어머니들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지요. 봄이 되면 나물 캐러 뒷산에 오르는 것은 아마도 유일한 탈출구였을 겁니다. 진달래의 연분홍빛 꽃잎은 우리 어머니들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놓았을 겁니다. 진달래는 먹을 수도 있고, 백일해나 천식의 특효약이기도 했어요. 지천에 널린 진달래꽃에 파묻혀 우리 어머니들은 큰 해방감을 느꼈을 겁니다. 처음에는 한(恨)의 마음으로 바라보다, 진달래 꽃잎을 따서 뿌리며 나와 가족의 행복을 빌었고, 그런 정성이 이 땅의 자식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어요.”
▶섬진강은 김 시인이 어릴때부터 항상 곁에서 흘렀다. 김 시인은 요즘 강에 날아온 오리들을 사진찍는 재미에 푹 빠졌다고 한다.
“한국 산천 풍경의 색깔이 가장 한국적”
섬진강의 자연과 그 속에서 사는 이야기를 쉽고도 친숙한 시어로 표현한 김 시인에게 ‘한국적이란 정서’가 무엇인지 물었다.
“삶의 형태가 한국적이라는 것은 이미 사라졌어요. 인정이 넘친다거나 공동체 삶이 한국적인 시대는 지났어요. 한국적인 풍경을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꼽고 싶어요. 부드러운 산 능선과 굽이치는 강굽이, 경지 정리가 덜 된 논과 밭, 무심히 서 있는 나무들. 특히 산천의 색깔이 한국적입니다.”
화가와의 대담 탓인지 시인의 산천 색깔 표현이 귀에 쏙쏙 박힌다. “쌀쌀한 겨울바람이 미처 사라지지 않은 초봄, 산에는 노란 생강나무 꽃에 이어 진달래꽃이 핍니다. 그럼 산천은 보랏빛 색깔이 됩니다. 물기가 본격적으로 나무에 오르는 늦봄이 되면 산천은 검어집니다. 산의 나뭇잎이 연두색에서 초록색으로 넘어갈 즈음이죠.” 독특한 표현이다.
시인은 화가를 섬진강 다리 위로 이끈다. 평화로움이 산천에 가득 차다. “청둥오리가 오늘은 안 보이네요. 항상 수십 마리가 노닐었는데….” 시인은 오리를 기다린다. 해가 산등성이로 진다. 강물이 자려고 준비한다.
임실/글·사진 이길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