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디자인 작가 100여 명의 작품 430여 점이 한자리에 모였다. 세계 3대 산업디자이너로 꼽히는 스테파노 지오반노니가 총감독을 맡은 ‘루나파크展 : 더 디자인 아일랜드’다. 일반적 회화, 디자인 전시장에서 지루함을 느낀 관람객이라면 이번에는 다르다. 일상에서 익숙한 작품과 동심을 깨우는 작품이 만나 전시의 상식을 허물었다.
▶ 세계 3대 산업디자이너 스테파노 지오반노니가 총감독을 맡은 ‘루나파크展 : 더 디자인 아일랜드’가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11월 6일까지 개최된다. ⓒC영상미디어
국내에도 친숙한 스테파노 제품을 한눈에
루나파크展은 입구부터 익살스럽다. 스테파노 지오반노니가 디자인한 ‘루나’ 캐릭터의 입으로 들어가는 모양새다. 스테파노는 소위 ‘잘 팔리는 디자이너’로 알렉산드로 멘디니, 카림 라시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산업디자인의 거장이다. 그의 제품은 어린아이의 순수한 세계를 보는 듯한 디자인으로 메탈·플라스틱 소재를 활용해 감각적인 느낌을 강조한다. 제품의 유동성, 형태, 색감을 극대화해 자연스러운 곡선과 독특한 구성으로 이채로운 제품을 탄생시키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다. 그는 대중이 기능성뿐만 아니라 감성도 채워주는 상품을 선택할 수 있도록 표현한다. 카페, 미용실 등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의자 ‘봄보 스툴’이 대표적이다. 파리바게트 커피 컵도 그의 손을 거쳤다.
▶ 1 루나파크展에 참여한 디자이너들의 상용화된 제품이 전시돼 있다. 2 세계 최초로 플라스틱을 활용해
투명 의자를 만든 필립 스탁의 제품 3 토끼의 귀를 들면 이쑤시개가 나오도록 디자인된 스테파노 제품의 대형
오브제와 포블 키에르가 디자인한 ‘양 흔들의자’ ⓒC영상미디어
이번 전시에는 스테파노의 유명한 제품들이 대형 오브제로 재탄생해 관객을 맞이하고 있다. 특히 그의 대표작 ‘래빗체어’는 다수가 전시돼 놀이공원 곳곳에서 토끼가 뛰어노는 듯한 인상을 준다. ‘래빗체어’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뤄진 앙증맞은 의자다. 전시장에서 실제로 앉아볼 수도 있다. 아이와 어른 모두 기분 좋게 만드는 디자인에 절로 웃음을 짓는다. 대형 화분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메르돌리노(Merdolino)’도 상용화된 제품이다. 얼핏 모양만 봐서는 용도를 알기 어려운 이 제품은 ‘변기 솔’이다. 반전 가득하고 재밌는 변기 솔은 더 이상 화장실 구석에 숨겨둘 필요가 없어 인기를 모았다.
▶ 4 한 어린이가 전시장 내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5 덴마크 브랜드 ‘이오’의 동물을 소재로 한 제품들 6 스테파노 지오반노니가 디자인한 변기 솔 ‘메르돌리노’와 깔대기 ‘피노’가 대형 오브제로 전시됐다. ⓒC영상미디어
‘피노’는 피노키오의 긴 코를 이용한 깔때기다. 주방에서 사용할 때면 피노키오 코에서 콧물을 흘리는 모습을 연출한다. 화려한 색깔에 장난기 어린 본능을 자극하는 디자이너의 기질이 잘 묻어난다. 스테파노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평범한 제품에서 순간 웃게 되고 그런 순간이 늘어나면 우리 삶이 변한다고 믿었다. 그게 바로 디자인이 주는 힘이라는 것. 그럼에도 스테파노는 “내 디자인을 장난감이라고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디자인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유용하게 널리 사용하는 가치를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의 디자인은 개성 넘치면서도 대중적이다. 평범한 삶에서 유희를 추구하는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상이 예술이 되다
산업디자인은 브랜드와 함께 성장했다. 루나파크展은 디자이너와 함께 다양한 제품 브랜드를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1921년 설립된 알레시는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와 협업해 실험적인 제품을 선보여왔다. 1990년대부터는 플라스틱 제품을 대량 생산해 제품과 고객의 폭을 넓히며 ‘일상을 예술로 승화시킨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관객은 알레시의 ‘안나G와 산드로M’을 만나볼 수 있다. 귀여운 장난감 같지만 이 또한 제품이다. 1994년 알렉산드로 멘디니가 여자 친구의 기지개 켜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안나G는 와인 병따개다. 작가는 9년 뒤 자신의 이름을 따서 남자 친구 격인 산드로M을 출시했다. ‘안나G와 산드로M’은 후추갈이, 요리용 타이머 등에 접목된 신제품으로 다변화했으며 명품 입은 안나G, 세계의 전통 의상을 입은 안나G 등 흥미로운 에디션으로 대중에게 선보이고 있다. ‘안나G와 산드로M’은 세계에서 1분에 1개씩 팔리는 알레시의 대표적 베스트셀러로 본사 로비에 대형 모형으로 전시돼 있기도 하다.
디자인 전통 브랜드 ‘카르텔’은 세계 최초로 플라스틱 의자를 만든 기업이다. 플라스틱이 고급스러울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며 이탈리아 혁신 디자인의 상징이 됐다. 흥미진진한 제품은 내구성까지 갖춰 품질에서도 전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여기에는 카르텔 ‘고스트 시리즈’ 가운데 필립 스탁의 ‘루루 고스트’가 전시돼 있다. 필립 스탁은 최초로 플라스틱을 활용한 투명 의자를 디자인했다. 당시 유리처럼 보이는 투명 의자는 의자로서 기능을 다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샀다. 필립 스탁은 우려를 불식했다. 광고에서 망치로 의자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연출한 것. 투명 의자는 절대 부서지지 않았다. 이 광고 후 뛰어난 내구성을 인정받아 오히려 플라스틱 혁명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투명한 의자는 공간을 넓어 보이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갖춘 필립 스탁의 의자는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핸드메이드 인형으로 유명한 도나 윌슨은 그 자체가 브랜드다. 독특한 질감의 양모를 이용해 한 땀, 한 땀 손수 바느질로 제작하며 국내에도 다수의 팬을 확보하고 있다. 삐뚤빼뚤한 봉제 인형은 여우, 핑크 플라멩코, 원숭이, 앵무새, 판다 등 다양하다. 그는 어린 시절 농장에서 자라며 받은 따뜻한 감성을 동물로 표현했다. 인형 옆에는 각각의 이름, 성격, 식습관이 세세하게 적혀 있다.
돌아갈 땐 “잘 놀았다”
전시장 곳곳에 무심하게 툭툭 놓여 있는 빨간 물체가 있다. 일명 ‘팽이 의자’라 불리는 ‘스펀(Spun) 체어’다. 독특한 예술 접근 방식과 디자인 사고를 인정받은 영국의 대표 디자이너 토마스 헤더윅이 훌라후프 돌리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 스펀 체어는 평평한 금속판을 회전시켜 입체 형태의 모양을 유지했다. 아이들을 위한 의자 같지만 실제로는 성인을 위해 만들어졌다. 놀이기구에 탄 듯 스펀 체어에 앉으면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올 것이다.
베네데타 모리 우발디니는 철물점, 공사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소재로 낯선 디자인을 시현했다. 혹자는 양파망 또는 그물로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제품은 철망을 이용했다. 전시장 내부에 있는 해파리는 미세한 바람에 따라 해파리가 유영하는 묘한 장관을 연출한다. 전시장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나볼 수 있는 물고기도 우발디니가 고안했다. 이외에도 흘러내리는 시계로 유명한 초현실 작가 살바도르 달리의 입술 모양의 소파도 재미를 더한다.
루나파크전은 미술관보다 놀이공원에 가깝다. 전시장 내부에 흘러나오는 음악도 그렇다. 신나는 팝송은 물론 익숙한 게임의 배경음악이 흘러나오며 흥을 돋운다. 편견을 깨는 디자인이니만큼 미술관의 흔한 동선도 없다. 원하는 곳에서 놀다가 다른 곳으로 향하면 될 정도로 자유롭다. 따라서 얼마나 참여하고 즐기느냐에 따라 작품을 이해하는 깊이가 달라진다. 집으로 돌아갈 때 “잘 놀았다”고 한다면 전시를 충분히 이해한 셈이다. 루나파크전은 그런 전시다.
루나파크展 : 더 디자인 아일랜드
기간 11월 6일까지(연중무휴) 오전 10시~오후 8시
장소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M배움터 디자인전시관
입장료 성인 1만 5000원 청소년 1만 1000원 어린이 9000원
도슨트 매일 오전 11시 오후 2시, 5시, 7시
문의 02-6004-7720
선수현│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