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직지심체요절>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다. 우리나라가 IT, 드라마, 영화 등에서 앞서가는 콘텐츠 강국이 된 것은 천 년을 이어온 ‘활자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을 재현한 모습. 고려 후기인 1377년 충북 청주에 있는 흥덕사에서 찍어냈다. ⓒ조선DB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구텐베르크의 기술은 조선에서 들여온 것으로, 세계 인쇄술의 발전은 모두 한국 덕분이다.”
2005년 5월, 서울디지털포럼에 참석한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영국 셰필드대학교의 존 홉슨 교수는 자신의 저서 <서구 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에서 “인쇄술, 금속활자의 기원을 16세기 중국과 14세기 초 한국에서 찾을 수 있다”고 쓰기도 했다. 미국 <라이프>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금속활자’를 선정했다. 그만큼 인쇄기술의 발명이 세계사에 끼친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인쇄, 인류 문화를 바꾼 발명품
인쇄술이 등장했다는 것은 문명사의 대전환기를 뜻한다. 필사의 시대에서 간본의 시대로의 전환이다. 일부 식자층만 누렸던 교육과 지식이 일반인에게까지 흘러갔고 이는 사회 전체의 수준을 높이는 원동력이 됐다. 실제로 서구 사회에서 인쇄술의 발달은 절대왕권 사회가 시민 사회로 바뀌는 구심점이 됐고, 권위주의 사회를 지나 자유주의 사회로 향하는 교두보가 됐다.
인쇄술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목판인쇄술과 금속인쇄술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먼저 등장한 것은 목판인쇄술이다. 이는 글자대로 목판을 판 뒤 종이에 찍어내는 기술이다. 먹만 있다면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한 글자라도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이를 보완한 것이 활판인쇄술, 금속활자다. 판 위에 밀랍으로 금속활자를 고정해 종이에 찍는다. 위치를 바꾸는 게 쉽기 때문에 목판보다 여러 종류의 판을 만들 수 있다. 목판이 소품종 대량생산에 유리하다면, 활판은 다품종 소량생산에 알맞다.
처음 목판 인쇄물이 등장한 것은 신라시대다. 경주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목판권자본이 경덕왕 10년인 751년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는 현존하는 목판 인쇄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후 목판인쇄는 꾸준히 발달했고, 고려시대에도 이어져 1007년에는 <보협인다라니경>이 제작됐다. 목판인쇄술의 대표가 팔만대장경이다. 세계적인 기록유산으로 여겨질 정도로 수준이 높다. 팔만대장경은 부처의 법력으로 몽골군을 물리치겠다는 소망을 담은 것으로, 불자는 물론 왕족, 관리, 문인, 백성들이 한마음이 되어 8만 1258자를 완성했다. 이 과정은 무려 16년이 걸렸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최 씨 무신정권은 이 작업을 위해 대장도감을 만들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새길 때마다 세 번씩 절을 하며 만들었다. 수천만 개의 글자 중 한 글자도 빠짐없이 고르게 새겨지고, 잘못된 글자가 없는 이유다. 외세의 침입 중 칼에 맞서 만들어진 이 글자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장경판으로, 이 팔만대장경이 보존되어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 경남 합천 해인사에 보관 중인 세계문화유산 팔만대장경. ⓒ조선DB
칼에 맞서는 소망을 담은 한 글자 한 글자
금속활자로 새겨진 가장 오래된 활자본은 <직지심체요절>이다. 고려 후기인 1377년 충북 청주에 있는 흥덕사에서 찍어냈다. 당시에는 50~100부 정도의 책을 만든 것으로 전해지는데, 현재는 이 중 하권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1866년 조선 병인양요 때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직지심체요절>은 승려인 백운 화상이 부처 및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승려들의 말씀과 편지 등을 수록한 책이다. 직지심체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에서 나온 말로, ‘참선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보면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에는 인쇄술이 더욱 꽃을 피웠다. 학문과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고 악보를 새로 정비할 수 있었던 것은, 태종이 주자소를 만들어 그 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반드시 책을 읽어 이치를 깨닫고 마음을 바로잡아 백성을 평안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바다 건너 중국에서는 책을 들여오기가 힘들다. 또한 책을 찍는 판목은 갈라지기 쉽고 책을 찍는 데 힘이 많이 들어 많은 책을 인쇄하기 어렵다. 그러니 청동으로 글자를 만들어 책을 찍는 것이 이롭다”라고 말했다.
덕분에 태종 3년인 1403년, 계미자라는 청동 활자가 탄생했다. 세종 때는 이 계미자를 보완한 경자자를 만들었다. 이후 집현전 학사 김돈, 김빈과 장영실이 만든 갑인자는 글씨체가 깨끗해 하루에 40장 이상을 인쇄할 수 있었다. 당시 인쇄한 천문, 역법에 관한 책은 이 갑인자를 활용한 것이다.
이처럼 세계 최고(最古)이자 최고(最高)의 인쇄술을 지녔던 조선의 정신은 후손에게도 면면히 이어졌다. 일제의 침입 앞에서도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고 했던 안중근 의사의 말은 그를 엿보게 만든다. <책, 문명과 지식의 진화사>를 쓴 니콜 하워드는 “문화가 아무리 변하고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수작업으로 하는 목제나 수제활자, 수제인쇄, 수제제본은 우리의 과거를 이해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핵심 기술이다”라고 강조했다. 한국이 IT, 드라마, 영화 등에서 앞서가는 콘텐츠 강국이 된 것은 천 년을 이어온 ‘활자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유슬기│조선pub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