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은 해학을 통해 신분사회를 뛰어넘어 상생(相生)의 정신을 추구했다.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는 정신은 지역공동체를 건강하게 지켜내는 원동력이었다.
“동물 중에서 웃는 것은 인간뿐이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이다. 그는 인간과 짐승을 구별하는 중요한 요소로 ‘웃음’을 꼽았다. ‘웃음’을 가리켜 서양에서는 유머라 하고, 한국에서는 해학(諧謔)이라 말한다. 한국의 해학은 고유하고 독특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서양의 코미디와 개그라고 해서 결코 해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해학의 사전적 의미는 ‘익살스럽고도 품위가 있는 말이나 행동’이다. 해학의 ‘해(諧)’는 화합하고 조화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해학이란 웃음을 통해 슬픔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루겠다는 뜻이다.
한국의 해학은 옛날부터 민중들에 의해 전설, 민화, 탈춤, 판소리 등의 양식 속에 다양한 모습으로 전래되었다. 해학은 희극적, 놀이적, 유머적 요소를 모두 담고 있다. 한국인은 해학을 통해 인생을 유쾌하고 슬기롭게 만들어나갔다. 해학은 그 속에 슬픔을 이겨내는 여유와 따뜻함을 담고 있다. 이 때문에 해학은 결코 단순한 웃음이나 일회성 즐거움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선조들의 국가적인 행사 속에서도 해학을 엿볼 수 있다. 고구려의 ‘동맹’과 예의 ‘무천’, 부여의 ‘영고’와 삼한의 각종 추수감사제는 신바람 문화를 만들었다.
당시 거대한 축제문화는 백성들을 서로 화합하게 해주었다. 이를 통해 백성들은 역동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생성할 수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민화, 탈춤, 민화 등에 녹아 있는 해학은 한국인의 삶 속에 깊숙이 박혀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전문가 100인과 일반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국 문화유전자’를 설문조사한 적이 있는데, 이때 ‘해학’이 꼽히기도 했다. 그만큼 해학은 한국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가치다.
세계가 감탄하는 한국의 해학문화
“놀랍다. 한국에 이런 가면이 있다는 것이, 하회탈과 사람들의 정신, 삶의 모습들이 잘 갈무리되어 있는 탈놀이를 가지고 있는 한국은 선조들로부터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축복받은 곳이다.”
중국의 베이징 중앙희극대학교 학장이 안동의 하회탈 공연을 보고 밝힌 소감이다. 그는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한국인의 해학이 담긴 탈놀이에 감탄했다. 하회탈이 세계 다른 탈문화와 차별화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해학 때문이다. 전통사회 속에서 하회별신굿은 지역공동체를 하나로 아우르는 축제이자, 평등한 세상을 추구하고자 하는 민중들의 정신이 깃든 축제였다. 하회마을에서는 별신굿을 하면서 마을 사람들이 탈을 쓰고 춤을 추었다. 하회별신굿이 열리는 기간에는 양반과 상민, 남성과 여성, 젊은이와 늙은이, 부자와 빈자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밤새도록 가무를 즐기고 마음껏 소리치는 세상을 누릴 수 있었다. 축제에는 없는 자, 눌린 자들이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자신들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폭발력이 있었다. 해학이 담긴 안동의 탈놀이는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한국인들은 해학을 통해 신분사회를 뛰어넘어 상생(相生)의 정신을 추구했다.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는 정신은 지역공동체를 건강하게 지켜내는 원동력이었다. 이는 해학이 추구하는 바와 맞닿아 있다. 양반과 상민 간의 갈등을 해학으로 완화하려고 한 셈이다.
속담에도 해학의 정신은 깃들어 있다. “웃는 집안에 복이 온다”,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한다” 등이 대표적이다. 선조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고(故) 김열규 서강대 교수는 <왜 사냐면, …웃지요>라는 저서에서 “한국인만큼 웃음을 다양하게 표현해온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모르긴 해도 웃음의 가름을 이토록 미주알고주알, 극세공한 것으로는 한국어가 단연 세계 제일일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만큼 한국인과 웃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조선시대 화가 김홍도의 민화에서도 해학을 엿볼 수 있다. 김홍도의 ‘빨래터’에서는 빨래를 하는 아낙들을 몰래 훔쳐보는 우스꽝스러운 선비의 모습이 나온다. 또 다른 작품인 ‘벼타작’에서는 벼를 타작하는 숨 가쁜 노동의 현장이지만 노동자들의 웃음꽃이 피어 있다. 이를 두고 김대행 서울대 명예교수는 “웃음으로 눈물 닦기”라고 표현했다. 비애의 정서를 웃음으로 해소하는 의도적 행위라고 정의한 것이다.
▶ 마당놀이 ‘심청이 온다’에서 국립창극단 배우들이 심봉사와 뺑덕어멈을 연기하는 모습.(위)
김경아 명창이 ‘춘향가’의 한 대목을 부르고 있다. ⓒ조선DB
한류 열풍을 만든 문화유전자 ‘해학’
슬픔을 슬픔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전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판소리나 탈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슬픔을 웃음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한국 해학이 가진 독특한 개성이다. 웃음으로 눈물을 닦고 한을 풀 수 있다는 것, 한국인의 낙천적인 기질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한국인의 해학적 정서는 오늘날에는 다양한 문화적 콘텐츠로 생성되고 있다. <한국인의 문화유전자>라는 책에서 이상민 가톨릭대 교수는 “한국 문화에서의 흥은 서양 문화에서처럼 이분법적 대립이 전복돼 한쪽이 주도권을 잡는 데서 유발되는 게 아니라 한데 뒤엉키고 섞여 이해하고 화해를 하는 데서 나온다”고 말했다. K-POP, 한국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 등의 한류가 전 세계를 휩쓴 이유도 바로 한국인의 흥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처럼 해학은 이데올로기나 논쟁, 어떤 제도권이나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다. 해학 속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와 뼈대 있는 철학이 녹아 있다. 해학은 권위나 고압적인 분위기, 세속적인 가치관들을 희극적 상황을 통해 전환시킨다. 슬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한국인의 해학에 대해 윤병렬 연세대 철학연구소 연구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해학은 우리의 평범한 삶과 밀착되어 있다. 생활예술과 종합예술 및 철학적 혼이 깃들어 있는 해학은 오늘날의 인문학과 문화 예술과도 자연스럽게 접목될 수 있다. 해학에는 힘겨움과 슬픔을 달래고 극복하는 묘약 같은 신바람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한국인의 해학은 놀라운 지혜다.”
김태형│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