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부자가 많다. 그러나 모은 재물을 바르게 쓸 줄 아는 부자는 드물다. 경주 최 부자 가문은 ‘덕이 있는 부자’, 이른바 ‘덕부(德富)’로 불린다. 근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도. 현세대가 계승할 정신이 분명해서다.
굉장한 부자였다. 오죽하면 이런 말도 있었다. “최 부잣집 땅을 안 밟고는 경주 일대를 지날 수 없다.” 만석의 부는 1대 최진립(1568~1636)부터 12대 최준(1884~1970)까지, 무려 12대 동안 이어졌다. 300년 이상 부자였다는 얘긴데, 단순한 부자였다면 이렇게 유명해지지도 않았다. 덕도 함께 베풀어 주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손꼽히는 이유다.
나눌수록 부자가 됐다
부를 쌓은 건 1대 최진립 때부터지만, 처음부터 명성이 따라붙은 건 아니다. 최진립은 임진왜란에 참전하고, 정유재란 때 공을 세운 인물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위도총부도사, 공조참판, 삼도수군통제사 등의 관직을 지냈다. 공으로써 부를 쌓았고, 후대까지 ‘지주’로 살 수 있었다.
이 가문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11대 최국선 때부터다. 경주 최 부잣집 종손 최염 씨는 “당시 지주는 소작인에게 소작을 주고 8~9할을 거둬가던 시절이었다”면서 “그런데 최국선 할아버지 때부터 반분작(소작료를 반, 즉 5할만 받는 것)을 시행했다”고 말했다.
소작료를 줄인 배경은 이렇다.
“섣달이 되면 양식이 없어지지요. 때문에 소작인들은 지주들로부터 장리(長利)를 썼습니다. 곡식을 빌려간 다음, 장기간에 걸쳐 농사 후에 양식을 2배로 갚는다는 의미입니다. 장리는 요즘 말로 하면 고리대금이지만, 당시에는 이마저도 소작인들에겐 감사한 일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최씨 집안에 명화적(횃불을 든 도적)이 쳐들어왔다. 도적들이 가져간 건 양식이 아니라 장리 증표인 채권 서류들. 최 씨 가족들은 “소작인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했지만, 최국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만둬라. 혼자 잘살아 무엇하겠느냐. 남은 채권 문서도 모두 불태워라. 그리고 앞으로 소작료는 5할만 받겠다.”
당시로는 획기적인 조치였다. 얼마 후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소작료를 반으로 줄였는데, 수입이 줄기는커녕 오히려 더 부자가 됐다.
“그때는 땅이 매물로 나와도 사람을 통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었죠. 언제부턴가 지역 일대 소작농들이 경쟁하듯 달려와 ‘어디에 논 매물이 나왔다. 최 부자께서 사주세요’라고 알려줬습니다. 우리 논이 늘어날수록 소작인들은 적은 소작료로 더 많은 농사를 지을 수 있었으니까요. 우리가 논을 사면 자신들에게 이익이라고 생각한 거죠.”
덕 있는 부자의 비결은 가훈
무상으로 베푸는데도 인색함이 없었다. 흉년이 들면 동네 어구에 활인소(조선시대 빈민구호기관)를 지었다. 커다란 가마솥을 여러 개 걸어놓고 죽을 끓여서 빈민들에게 나눠줬다. 곳간을 열어 쌀을 나눠주기도 했다. 겨울에는 옷을 지어 추위로 죽는 사람이 없도록 했다.
▶ 경주 최 부잣집 앞마당 ⓒ조선DB
▶ 최 부잣집 곡식창고. 곳간을 열어 빈민들에게 쌀을 나눠주기도 했다.(위)
최부잣집의 옛 풍경. 시집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게 했다. ⓒ조선DB
“종손이라 여섯 살 때부터 할아버지와 한방을 썼습니다. 할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있어요. ‘부귀영화를 다 가질 순 없고 설령 가진들 오래가지 못한다. 부자가 벼슬이나 권력까지 탐하면 넘치는 것이다.’ 항상 절제하고 인심을 잃지 않아야 오래간다는 가르침을 주셨지요.”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는 “최 씨 가문은 재산을 감당할 만한 인격이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천하 갑부라도 하루아침에 무너진다고 봤다”면서 “최 부자 가문이 부와 명예를 함께 지킬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은 인격 수양을 바탕으로 한 자기 관리와 끊임없는 노력”이라고 말했다.
이런 최 부잣집의 가훈이 인상적이다.
‘진사 이상 벼슬은 하지 말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세상에 내놓아라,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위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최씨 가문에서는 이를 ‘육훈(六訓)’이라 부른다.
육훈의 내용에는 현세대가 받들어야 할 당시의 시대정신이 그대로 들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최 부잣집 아카데미를 만들어 21세기형 최 부자 가문을 배양하자’는 움직임까지 일고 있다. 이강식 경주대학교 경영학 교수는 “최 부잣집의 육훈에서 도출한 정경분리, 공정경쟁, 소통경영, 복지경영, 친서민정책 등은 현대에도 통용될 수 있는 원리로서 시공을 넘어 충분히 유효하게 작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 부잣집 六訓과 현대 사회
전문가들은 500년 전 최부잣집의 육훈이 현대에까지 통용된다고 피력한다.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는 “육훈의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와 두 번째 ‘만석 이상의 재산은 모으지 말라’는 지나친 욕심이 초래할 화를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선견지명의 발로”라면서 “정치의 희생양이 되거나 지나친 욕심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일을 방지하게 했다”고 해석했다.
이강식 경주대학교 경영학 교수는 또 “특히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는 건 정경유착을 피하고 정경분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라면서 “불가근불가원 관계를 이해하고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현대에서도 기업이 정치와 맺어야 할 관계에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고 설명했다.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는 건 공정경쟁을 의미한다. 흉년에는 궁핍한 농부가 헐값에 땅을 내놓는 경우가 많다. 싼값에 땅을 살 수 있다는 말인데, 그렇게 되면 원망과 질시를 받아 결국 가문의 명성과 평판을 낮추게 된다. 이 교수는 “이 교훈은 상대의 약점을 노려 사업을 하지 말라는 뜻”이라면서 “이 역시 장기적인 관점에서 경영을 하는 지혜”라고 말했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것은 ‘개방’과 ‘소통’이라는 교훈을 준다. 이 교수는 “최 부잣집은 사랑채를 개방하고 과객을 후하게 대접했는데, 이러한 소통이 최 부잣집에 대한 외부의 경계심을 없애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면서 “농경사회에서 개방과 소통을 통해 지속가능한 경영을 한 것”이라고 했다.
또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은 ‘복지경영’의 효시가 됐다. 책임 범주의 최대 범위를 100리로 정한 이유도 있다. 지속 가능한 사회공헌 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 교수는 “며느리에게 3년간 무명옷을 입혀라, 한 것은 가난한 서민의 심정을 이해해야 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친서민정책’의 일환”이라면서 “이는 잦은 민란 속에서도 부를 유지하는 데 큰 힘이 됐으며, 현대사회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박지현│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