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균 씨에게 2013년은 인생이 달라진 해이다. 이제 막 봄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한 3월, 취미삼아 시작한 오토바이 동호회 회원들과 속초에 가는 길이었다. 선두로 가던 회원이 몰던 오토바이가 갑자기 넘어졌다. 뒤이어 가던 함 씨는 그걸 피하려다 가드레일에 머리를 박았다.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경추골절이 왔고 전신마비 판정을 받았다. 현란한 마술을 펼치던 마술사는 말 그대로 ‘어쩌다 장애인’이 됐다.
2년 남짓 되는 긴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다 처음으로 바깥으로 나왔다. 전동휠체어 없이는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럭저럭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지하철역에서 처음으로 난관에 부딪혔다. 환승을 해야 하는데 엘리베이터나 휠체어리프트가 어디에 있는지 찾기 힘들었다.
한 시간 가까이 역사를 맴돌며 환승할 방법을 찾는데 순간 화가 치밀었다. 서울 지하철의 경우 약 90% 역사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다. 시설은 우수하지만 환승하는 법을 알려주는 표지판이나 안내책자는 잘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환승할 방법을 찾지 못하면 역무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중간에 기다리는 시간, 찾는 시간을 합하면 반나절이 훌쩍 흘러버리기 일쑤다.
“장애인이 되기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였어요. ‘지하철은 시민의 발이나 마찬가진데 장애인은 그 발을 제대로 이용할 수 없구나’ 하는 생각에 울컥하기도 했죠. 이런 어려움을 겪는 장애인이 많을 거예요. 지하철을 탈 때마다 환승 때문에 불편을 겪는 장애인에게 환승정보를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어쩌다장애인함박TV를 만들게 됐죠.”
▶ 어쩌다장애인함박TV 운영하는 함정균 씨 ⓒC영상미디어
‘어쩌다장애인함박TV’라는 이름은 함 씨 인생의 과거와 미래를 보여준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장애인이 된 자신을 가리키는 말인 동시에 장애인이 됐지만 함박웃음을 지으며 즐겁게 살 거라는 의지도 담았다.
영상을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고된 작업이다. 촬영, 편집, 자막 입히기까지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이런 막노동도 없겠다 싶을 정도로 긴 시간이 필요하다. 비장애인이 영상을 만들기도 힘든데 장애인은 오죽할까. 더군다나 함 씨는 전신마비 장애인이다. 왼손 중지, 오른손 검지만으로 영상을 만들어야 한다. 손을 움직일 수 없으니 직접 카메라를 들고 다닐 수가 없다. 카메라를 들 손을 대신해 전동휠체어에 거치대를 설치했다. 휠체어 거치대에 카메라, 마이크, 핸드폰을 고정해놓고 촬영한다. 촬영시간은 역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2시간 정도다.
서울 62개역 환승정보 담은 161개 영상 제작
촬영을 마쳤으면 이제 편집을 할 차례. 마우스는 쓰기 불편해 대신 탭패드로 편집한다. 자막은 하나하나 입력한다. 비장애인은 15분이면 타이핑할 양을 함 씨는 1시간 정도 걸린다. 하루 꼬박 촬영과 편집을 하고 나면 약 5분 남짓한 영상이 완성된다. 완성된 영상을 유튜브에 업로드한다. 다른 영상플랫폼을 다 찾아봐도 유튜브만큼 영상 업로드가 쉬운 곳이 없었다. 워낙 이용자가 많아 지하철 이용에 불편을 겪는 장애인들이 보기 좋은 플랫폼이기도 했다.
순전히 함 씨의 노력으로만 만들어진 지하철 환승영상은 2016년 11월 처음 업로드 됐다. 이후 2017년 2월부터 함박TV의 이름을 달고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다. 서울 일대 지하철역을 돌면서 여러 라인이 겹치는 역은 장애인이 환승하기 더 힘들다는 점도 알게 됐다. 서울역, 왕십리역 같은 곳도 복잡했지만 그중 최고는 5호선, 6호선, 공항철도가 지나가는 공덕역이었다. 공덕역 촬영은 4시간이나 걸렸다. 신설동역을 촬영할 때는 환승 안내가 제대로 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결국 역무원의 도움을 받아 촬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지난 1년 6개월 동안 서울 지하철 62개 환승역의 환승 방법을 담은 161개 영상이 탄생했다. 서울 지역 환승영상 촬영이 끝난 후 지금은 경기도 지하철 환승 방법을 촬영하고 있다. 수십 개 역을 다닌 함 씨의 기억에 오래 남았던 역은 어디였을까?
“대림역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환승을 하려고 리프트를 불렀는데 리프트가 다니는 길이가 어마어마했어요. 충무로역이나 이대역보다 훨씬 가팔랐어요. 리프트를 호출하고 나니 역무원이 와서 리프트가 내려와서 저를 태우고 올라가는 데 40분이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어떻게 환승해야 하냐고 물으니까 외부로 나가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게 나을 거라고 했어요. 그때 다시 한 번 의지를 불태웠어요. 이 일을 끝까지 완수해서 불편을 겪는 수고를 덜어줘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겼어요.”
함 씨는 지하철 환승영상뿐 아니라 일상을 다룬 영상도 자주 업로드한다. 휠체어를 타고 여행을 다니는 법, 지체장애인이 수상레저를 즐길 수 있는 곳, 대중교통을 이용한 나들이 코스 등 장애인의 생활에 유익한 정보도 있다. 영상 개수가 늘어날수록 댓글도 늘어났다. 좋은 일을 한다는 칭찬, 어느 역도 촬영해달라는 요청 등 다양한 댓글이 달렸다. 그중 함 씨를 가장 기쁘게 한 댓글은 미국 동포가 쓴 댓글이다. 남편과 함께 한국에 여행을 오고 싶은데 남편이 중증장애인이라 어떻게 다닐지 막막하던 차에 함박TV를 보고 한 줄기 빛을 본 느낌이라는 내용이었다. 함박TV에 있는 환승정보만 믿고 한국 여행을 결심했다는 글을 보고 뿌듯함이 밀려왔다.
“함박TV를 하면서 세운 목표가 생겼어요.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장애인이 좀 더 편리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도록 하는 거예요. 지하철 환승뿐 아니라 도로에 있는 턱처럼 장애인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불편함을 이젠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장가현│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