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소중한 기억은 오래도록 간직하길 바란다. 그래서 기억하기 위해 기록한다. 그날 느꼈던 기분을 글로 쓰고, 소중한 순간을 영상으로 남기는 것도 기억하고 싶어서다. 기억 속에서 희미해질 것들을 계속해서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이나 사진처럼 영화도 기록하기에는 좋은 방법이다. 기록 방법으로 보자면 오히려 글이나 사진보다 더 낫다. 그래서 사회에 꼭 기억해야 할 일이나 사람을 영화로 남긴다. 잊지 말아야 할 일들을 영화로 기록하는 셈이다.
영화 ‘집의 시간들’도 기억하기 위해 만든 영화다. ‘집의 시간들’은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둔촌주공아파트는 1980년 3월 입주를 시작했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주민들의 보금자리였던 둔촌주공아파트는 지금은 재건축을 위해 모두 철거됐다.
▶ ‘집의 시간들’은 사람이 아닌 둔촌주공아파트와 주변 풍경이 주인공이다. ⓒKT&G 상상마당
‘집의 시간들’에서는 공간이 주인공이다. 정확히 말하면 둔촌주공아파트에 살았던 사람들의 공간을 향한 애정이 주인공이다. 그래서 스크린을 채우는 것도 공간이다. ‘집의 시간들’을 만든 라야 감독은 재건축이 현실로 다가온 둔촌주공아파트 주민들을 만나 이들에게 집이 어떤 의미를 준 존재인지 물었다.
“저 역시 아파트에서 태어나서 자랐어요. 아파트는 고향이나 다름없어요. 몇 번 이사를 다니면서 지금은 서울 송파구 잠실에서 5년 넘게 살고 있는데, 이 동네에도 오래된 아파트가 많거든요. 여기에서도 재건축 이야기가 제법 들려와요. 오래된 것이 전부 사라진다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들었는데, 제가 가장 오래 살았던 아파트도 재건축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에게 친숙했던 공간이 사라진다니 더 재건축 아파트를 특별하게 바라보게 됐죠.”
▶ 재건축을 앞둔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 주변 풍경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은 영화 ‘집의
시간들’ ⓒKT&G 상상마당
▶ 영화 ‘집의 시간들’의 라야 감독 ⓒ박수환
라야 감독의 작품 중 영화관에서 개봉한 것은 ‘집의 시간들’이 처음이다. 작품 대부분이 ‘DMZ국제다큐영화제’, ‘디아스포라 영화제’ 등 주로 영화제에서 소개됐다. ‘집의 시간들’ 이전에 내놓은 작품은 단편영화가 많다.
라야 감독 작품 대부분이 풍경을 기록한 것이다. 단편 ‘우울의 경계’는 해질녘 도시의 색이 변하는 모습을 담았고, 명필름아트센터 개관전 ‘Crossing Waves’에 출품한 ‘발췌된 풍경’에는 도시 곳곳의 사계절을 기록했다. 공간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요소에 따라 인상이 달라진다. 그렇듯 시간이나 빛, 날씨, 계절에 따라 변하는 풍경의 인상을 발견하는 게 좋았다. 오랜 시간 동안 그 모습을 관찰하면서 의외의 면을 발견했다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처음에는 멀리서 바라보다가 가까운 곳의 풍경을 담기 시작했다. 집 안을 기록하는 프로젝트 ‘가정 방문’은 그렇게 시작됐다. ‘가정 방문’이 집의 얼굴을 주로 보여주는 프로젝트라면 ‘집의 시간들’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까지 담는다.
라야 감독이 둔촌주공아파트와 인연을 맺은 것은 비정기간행물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를 읽고 나서다.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는 실제로 이곳에서 살고 있는 이인규 편집장이 재건축을 하기 전 아파트의 모습을 책으로 남기는 프로젝트다. 라야 감독은 책을 넘길수록 아파트에 대한 주민들의 사랑이 느껴졌다. 그러다 재건축이 되기 전의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 편집장을 만나 둔촌주공아파트를 영화와 책으로 기억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당신의 집을 기록해드립니다
시작은 인터뷰이를 모집하는 일이었다. 아파트 게시판에 ‘당신의 집을 기록해드립니다’라고 쓴 전단지를 배포해서 신청자를 모집했다. 신청자에게 집 내부를 찍은 사진과 집에 어떤 사연이 담겼는지도 함께 받았다. 촬영할 집을 선정하고 난 뒤에는 직접 집에 찾아가서 한 주 동안은 감독이 집과 친해지기 위한 시간을 보냈다. 그다음 한 주는 다시 방문해 촬영만 진행했다. 한번 인터뷰를 할 때마다 기본적으로 한두 시간 정도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2주 만에 주민들 인터뷰와 촬영이 끝났다. 촬영 기간을 오래 잡기에는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영상 촬영을 위한 장비 대여료가 만만치 않았던 것. 빡빡한 스케줄 속에서 작업은 꾸준히 이어졌다. 촬영은 2주 만에 끝났지만 녹취를 정리하고 편집하는 과정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도 있고 아파트의 나이에 비해 짧은 시간을 살았던 사람도 있다. 이들이 집에 품은 애정은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길게 살았든 짧게 살았든 집에 대한 애정은 한마음이었다. 감독은 주민들의 마음을 담고 싶었다. 재건축 이슈 자체나 무너지는 건물의 모습이 아니라 오랜 시간 정들었던 곳과 헤어져야 하는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다.
영화는 조용히 흘러가는 풍경과 함께 주민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아파트는 겉으로 보면 다 똑같아 보인다. 그래서 아파트라는 말 뒤에는 ‘개성이 없다’, ‘천편일률적이다’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하지만 영화에 나오는 집은 어느 한 집도 똑같은 모습이지 않다. 집집마다 가족의, 개인의 역사가 묻어난다.
화면에 등장하는 집의 모습을 보면 이곳에 사는 사람이 ‘천주교 신자의 집이구나’, ‘뜨개질이 취미인 사람이 사는 곳이네’처럼 취향, 종교 같은 특징을 찾을 수 있다. 특이할 것 없는 그냥 ‘집’의 모습이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편안해진다.
집 안뿐 아니라 집 바깥 풍경도 익숙하다. 오래된 아파트 주변이 으레 그렇듯 둔촌주공아파트 역시 울창한 숲이 아파트를 에워싸고 있다. 아파트와 함께 약 40년을 자란 나무들은 5층 아파트만큼 큰 키를 자랑하고 나뭇가지도 울창하다. 아파트는 보통 집안에서 바깥을 내다보면 반대편 집이 보이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둔촌주공아파트에서는 나무 이파리가 보인다. 요즘 아파트에서 볼 수 없는 신기한 광경이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줄곧 집에 있는 기분이 든다. 집에 있을 때 들리는 바람 소리, 새소리, 밖에서 노는 아이들 소리가 들린다. 마치 우리 집에서 바깥을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힐링이 된다. 라야 감독 역시 촬영을 하면서 편안함을 느낀 순간이 있었다.
“이사 날짜가 잡힌 한 집만 먼저 인터뷰와 촬영을 진행했어요. 그날은 하루 동안 한 집만 다루다 보니 오랜 시간 머무르게 됐죠. 촬영도 하고 주민과 함께 밥을 먹고 그분이 좋아하는 라디오를 틀어놓고 다 같이 차를 마시고 쉬었어요. 촬영 때문에 방문했지만 집에서 온전히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촬영이었죠. 몇 주 뒤에 말끔하게 비워진 집을 보니 기분이 정말 이상하더라고요.”
▶ 둔촌주공아파트 주변 풍경과 아파트 내부 모습. 겉으로 보는 집 모양은 같지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른 모습이 펼쳐진다. 집집마다 주인의 성향과 개성이 한눈에 드러난다. ⓒKT&G 상상마당
영화는 둔촌주공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자신이 소개한다. 네 살 무렵에 이사 와서 결혼하고 낳은 딸이 벌써 처음 아파트로 이사 왔을 때 나이가 됐다는 사연, 지금 사는 집에서 태어나 20년 넘게 살다 떠났지만 아직도 이곳을 잊지 못하는 사연, 어렸을 적 이사를 갔다가 둔촌주공아파트를 잊지 못해 결국 되돌아온 사연까지. 주변에서 흔히 들을 만한 사연이지만 그래서 더 공감이 간다.
주민들은 모두 오랜 세월 동안 재건축할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살아서 재건축을 한다는 게 와 닿지 않는다고 말한다. 실감나진 않더라도 어쨌든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마음으로 계속 살아서 커튼을 못 달았다는 사연도 있다. 오히려 재건축이 빨리 진행돼서 금전적인 이익을 봐서 좋지만 아파트를 둘러싼 울창한 녹지가 사라지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큐를 찍으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유독 라야 감독에게 좋은 집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 이야기가 있었다.
“집은 구성원들이 서로 배려하면서 만들어간다는 말을 한 분이 있어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내용이라 그 말을 들으면서 깜짝 놀랐어요. 그동안 ‘나의 집’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분의 말이 곱씹을수록 위로가 됐어요. 좋은 집이란 기분 좋게 나서고 또 기꺼이 돌아오게 만드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죠.”
‘집의 시간들’은 10월 25일~11월 4일 서울 마포구 KT&G 상상마당 시네마에서 관객을 만난다. 개봉 전 이 영화를 만난 관객들은 둔촌주공 주민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처럼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 모두 정붙이며 사는 집이 있어서다. 오랫동안 함께해서 소중해진 공간이 저마다의 마음 한편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해가 지고 노을로 물들던 둔촌주공아파트에 밤이 오는 풍경을 보여주면서 끝난다. 어둠 끝에는 영화의 또 다른 제목(A Long Farewell)처럼 오랜 이별이 기다리고 있다.
사라지는 것을 기억하다…
‘개포동, 그곳’ 프로젝트
서울 강남구 하면 대부분 집값을 떠올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집값이 비싼 곳이란 각인이 박혀 있어서 강남에 집 한 채 마련해도 성공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누군가에게는 이곳이 경제적인 가치가 높은 곳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추억이 서린 곳이다.
‘개포동, 그곳’ 프로젝트는 이 소중한 공간을 기억하기 위해 기획됐다. 프로젝트의 주인공은 서울 강남구 개포주공아파트다. 개포주공아파트 저층 단지인 1~4단지 중 2, 3, 4단지는 이미 재건축에 들어갔고 남은 1단지는 지난 9월 30일에 주민들의 이주가 완료됐다.
‘개포동, 그곳’은 재건축을 앞둔 개포주공아파트에서 사라질 나무와 사람들의 기억을 기록하는 사진촬영과 영화촬영 작업이 주를 이룬다. ‘개포동, 그곳’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이성민 씨는 유년 시절을 개포동에서 보냈다. 개포주공아파트에는 최소 30년에서 40년은 된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는 약 1만여 그루의 나무가 오랜 시간 주민들과 함께했다. 여기서 30년 넘는 세월을 보낸 나무는 재건축이 되면 대부분 폐목으로 처리될 예정이다. 이식비용이 많이 드는 데다 재건축 이후에는 나무가 뿌리내리고 살 확률이 높지 않아서다. 이 씨는 재건축이 이뤄지고 나서 기록을 알릴 게 아니라 재건축이 진행되기 전 사라져버리는 것들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어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개포동 나무산책’도 개포주공아파트를 기억하려 만들었다. 나무산책을 신청하면 아파트 단지를 둘러보며 추억을 되짚는 시간을 보낸다. 고무줄, 땅 따먹기, 술래잡기, 나뭇가지 세우기 등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다시 한 번 기억을 되새기고 그 기억에 함께한 나무에 이름을 지어주기도 한다.
주민들의 이주가 끝난 지금 이성민 씨는 개포주공아파트를 기억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있다. 이 씨는 “개포주공아파트에 살았던 주민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아 그들이 기억하는 개포주공의 모습과 아파트가 사라지기 전의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성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