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이 말했다. 40세 이후에는 자신의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고. 얼굴이 삶의 궤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굴만? 몸 역시 책임져야 한다. 40세는 변화의 시기다. 더 이상 청년이 아니다. 청춘의 특권도 사라진다. 신체 변화는 더 두드러진다. 오죽하면 40세에 생애전환기 건강진단이 따로 있을까. 이영미 작가는 “마흔, 여자가 체력을 키워야 할 때”라고 한다. ‘체력’을 말하는 작가의 정체는 뜻밖에도 25년 넘게 200여 권의 책을 만든 출판계의 ‘대편집자’다. 동시에 철인 3종 경기에 15차례나 출전한 ‘트라이애슬릿’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책’이 아닌 ‘체력’을 주제로 <마녀체력>을 출간해 작가 타이틀도 얻었다.
“마흔이란 나이는 변곡점이에요. 뭔가 이뤄놓은 게 있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작용하고 잘 몰랐던 체력의 한계도 여실히 느껴질 때예요. 여성으로서 성적 매력이 사라지기도 하죠. 그런데 마흔은 아직 ‘아기’예요. 멋진 몸이 아니라 강한 몸을 만들어야 해요. 지금부터 해도 아직 늦지 않았단 말을 해주고 싶어요.”
▶ <마녀체력> 출간 후 편집자들과 ⓒ이영미
그의 목적은 20~30대의 체력을 유지하는 게 아니다. 앞으로의 50~60대를 대비한 체력을 기르는 데 있다. <마녀체력>은 출간 두 달 만에 7쇄를 기록했다. 마케팅 하나 없이 평범한 여성이 써내려간 소소한 경험담에 많은 독자가 공감했다. 특히 마흔 언저리의 여성들이 꾹꾹 눌러온 무언가를 건드린 탓이다. 편집자가 트라이애슬릿이 되는 건 꽤 이례적이다. 이 묘한 이질감이 주는 호감이란.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되는 과정과 유사하달까. 여기서 독자는 동질감을 느끼고 평범했던 오리에 감정 이입하며 백조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는지도 모른다. 꾹꾹 눌러온 갈증의 포인트라 할 수 있다.
마흔, 여자가 체력 키워야 할 때
작고 마른 그에게 저질체력은 늘 콤플렉스였다. 그래도 엄마로 아내로 최선을 다해 살았다. 출판사 편집자로서도 인정받았다. 역할과 책임이 늘어나는 건 당연했다. 예전보다 더 열심히 일했지만 능률은 떨어졌다. 오래 쓴 휴대전화 배터리처럼 금세 체력 배터리가 깜빡였다. 남은 건 고혈압과 스트레스뿐이었다. 그렇다, 그 역시 열심히는 하는데 무엇도 잡히지 않는 그저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30대 후반, 결정적 자극이 찾아왔다. 친구들 다섯 가족이 모여 지리산 인근으로 여행을 떠났다. 어느 순간부터 꾸준히 운동을 해온 남편을 비롯해 몇몇 친구들은 지리산을 정복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지리산은 평소 운동과 담 쌓고 살던 그가 올라갈 수 있는 산이 아니었다. 20대 청춘에는 아무리 험한 산도 겁나지 않았는데….
▶ 자전거를 타는 이영미 작가 ⓒ이영미
운동을 시작했다. 작은 목표를 세우며 욕심이 생겼다. 수영, 25m에서 75m로 조금씩 늘었다. 마라톤, 5km 달리기도 버거웠지만 어느새 10km를 완주했다. 자전거, 출퇴근 바구니 자전거가 뽕바지 입고 타는 전문 사이클로 바뀌었다. 삶에서 조금씩 나태함이 밀려났다. 이 작가는 “작은 목표부터 성취감을 이뤄가며 목표를 늘려가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이 정도만 했으면 그냥 건강한 중년 여성이 됐겠지만 그는 트라이애슬릿이 됐다.
▶ 철인 3종 경기대회에 출전한 모습(왼쪽). 책 출간 후 운동을 함께하던 부부 세 쌍과 몽블랑 하프코스에 도전했다. 몽블랑 트레킹 중 초원과 꽃을 배경으로 설산이 보인다(오른쪽). ⓒ이영미
발단은 무모함이었다. 그의 나이 40세, 동갑내기 여성이 출전하는 모습에 얼떨결에 철인 3종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대회 당일 사납게 쏟아지는 비는 그를 압도했다. 날씨 탓에 수영·자전거·마라톤 중 감사하게도 자전거 경기는 취소됐지만 대신 수영할 곳은 온통 흙탕물이었다. 수영장에서 뽐내던 자신감은 진짜 물, 그것도 거무튀튀한 물색을 마주하자 공포감에 자취를 감췄다. 그때 설상가상 눈앞에 죽은 쥐가 둥둥 떠내려갔다.
“그런 공포는 처음이었어요. 포기를 떠올리자 먼저 든 생각이 장비 값이었어요. 이미 동네방네 소문도 다 났고요. 어디선가 엄마를 응원하고 있을 아들도 떠올랐죠. 제가 포기하면 수영을 배우는 아들에게 겁내지 말라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싶더라고요.”
그는 몸을 던졌다. 첫 철인 3종 경기는 삶의 메타포였다. 강한 빗줄기와 죽은 쥐는 공포를 극대화하는 장치였다. 많은 사람은 두려움에 마주한 순간에서 멈춘다. 하지만 주인공은 다르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목표를 달성한다. 그 옆에는 조력자도 있다. 이 장면에서 그는 두려움을 극복했고 남편이 조력자로 등장했다. 포기하고픈 순간이면 조금씩 나아갈 수 있게 달콤한 속삭임을 계속했다. 악천후 속에서도 남편은 그의 옆에서 묵묵히 같이 달려주었다.
결과는? 꼴찌였다. 결승선에 들어온 건 제한시간을 훌쩍 넘어서였다. 그래도 완주했다. 그의 귓가에 우승자보다 큰 팡파레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그는 “만약 그날 포기했으면 다시는 도전 못했을 거예요. 공포에 무릎 꿇으면 다시 못하지만 극복하면 할 수 있어요”라고 했다. 실제로 동네 클럽에서 함께 도전한 네 명의 초보자 중 포기하지 않은 건 그뿐이었다. 모두가 같은 공포를 느낀 순간 작은 대담함이 결과를 바꿔놓은 것이다.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대중 앞에 나서기 두려워하고 땅을 보고 걷길 좋아하던 그였는데 눈빛, 자세, 목소리, 성격 모든 게 변했다. 극복할 수 있는 것도 늘었다.
“돈을 많이 벌면 다르게 살고 시간이 생기면 운동할 것 같지만 전혀 아니에요. 오히려 운동하는 습관이 들면 삶이 달라질걸요. 체력이 달라지면 자신감이 생기거든요. 마흔 살은 여자뿐 아니라 남자의 인생도 기점에 놓여요. 돈과 시간이 있어도 체력이 없으면 못하는 게 늘어나는 때이기도 하죠.”
체력은 자신감 만들어 삶 바꾼다
이제 50대 초반이 된 이영미 작가는 “지금 몸 상태가 절정”이라고 했다. 기량이 10년 전보다 훨씬 좋아졌단다. 신체 나이는 38세를 가리킨다. 아직도 절정까지 더 갈 것 같다고 했다. 건강이 아니다. 건강은 병이 없는 상태에 가깝다. 그가 말하는 것은 강한 체력이다. 강한 체력은 정신까지 바꿔놓는다. 판단이 흐려지지 않는 불혹(不惑)이어도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시행할 수 없을지 모른다.
물론 그도 어려움은 있었다. 수영을 배우며 오랜 시간 숨을 헐떡였다. 문제는 호흡이었다. 물속에서 ‘음’ 하고 길게 내쉬고 물 밖에서 짧게 ‘파’ 하며 들이마셔야 했는데 반대로 했으니 여간 힘들 수밖에. 달릴 때에도 호흡을 적용했다. ‘칙칙폭폭’ 네 박자에 맞춰 호흡하니 숨이 덜 찼다.
“일단 수영복, 자전거, 운동화를 좋은 걸로 사세요. 그러면 본전 생각나서 시작하게 될 거예요. 마크 레클라우가 쓴 <습관의 책>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와요. 모든 게 습관이 되려면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지금도 나에 대한 보상이 필요해요. 그래야 할 마음이 생기죠.” 그래, 일단 지르고 보자. 98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도 30년간 일주일에 세 번씩 수영을 꾸준히 했단다. 수십 년간 베스트셀러 작가로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는 69세의 무라카미 하루키는 세계 각지를 돌며 마라톤과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해왔다.
이영미 작가는 최근 버킷리스트를 하나 더 완수했다. 몽블랑 하프코스를 3박 4일간 트레킹한 것. 몽블랑은 1년에 6~9월만 길을 열어준다.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으며 걷다 보면 초원 위에 피어 있는 꽃과 마주한다. 봄과 겨울이 공존하며 압도적 풍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이번 여행은 네 쌍의 부부가 함께했다. 평소 철인 3종을 즐기는 남편들과 이 작가를 제외한 세 명의 아내는 평범한 중년 여성들이었다. 하는 운동이라고는 배드민턴뿐으로 한마디로 저질체력이었다. 마흔, 지리산을 보며 한숨만 내쉬던 예전의 이 작가처럼 세 여성들은 몽블랑에 가고 싶은 마음뿐 지레 손을 내저었다.
우선 번복할 수 없도록 예약부터 완료했다. 트레킹 6개월 전부터 특별 관리에 돌입했다. 하루 5km씩 걷고 한 달에 한 번 10km 산행에 나섰다. 6개월 특훈으로 저질체력들은 점차 개선됐다. 몽블랑 샤모니를 시작으로 하루 26km를 걷는 강행군도 있었지만 완주했다. 물론 포기하려는 순간이 왜 없었겠냐만 이들은 성취의 짜릿함을 맛봤다. 운동을 하면서 관광명소 대신 레저명소로 여행 방향을 잡았듯, 이영미 작가처럼 인생이란 여행의 방향도 바뀔 듯하다.
체력 길러 내 인생의 소영웅이 되자
이처럼 그의 주변이 변하고 있다. “저 작은 체력으로 철인 3종도 하는데 나라고 못하겠어?” 지극히 평범한 여성의 삶이 변하자 주변의 동요가 일었다. 도전의 장벽을 낮춘 셈이다. 30년 만에 만난 대학 동문들도 이 작가를 위시해 자전거 모임을 만들었다. 대부분이 50세를 넘겨 첫 페달을 밟은 이들이다. 꼭 마흔이 아니어도 된다. 체력을 키우는 것은 도전하고 성취하는 인생의 과정과 흡사하다. 50대에 변하면 60대 인생이 바뀌고, 60대에 변하면 70대 인생이 바뀐다. 어제가 쌓이고 쌓여 오늘이 되고 내일이 되는 것과 같다. 그의 50대 체력도 40세부터 그렇게 다져졌다. 단순한 이치지만 실천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이영미 작가가 거대한 담론을 내세우기보다 먼저 살아본 언니로서 경험담을 전하는 이유다.
<마녀체력> 처음과 끝에 영웅이 등장한다. 영웅은 용맹함으로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이다. 어려움에 마주했을 때 두려움에 굴복하면 영웅은 나오지 않는다. 내 인생에서 작은 것에 도전하고 두려움을 극복하는 인생을 산다면 누구 못지않은 소영웅이 된다.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살아지는 게 아니라 내 인생을 살아야 한다. 보통 40세가 되면 주어진 것에 순응하고 체념하며 삶에 끌려가기 십상이다.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몸은 이미 세월에 순응한다. 작가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내 인생의 소박한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체력을 기르며 자신감을 찾으세요. 늦지 않았어요. 40세 이후 인생을 즐기려면 체력이 돼야 해요.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뀌어요. 단 억지로 하지 말고 운동에 재미를 붙이세요. 혼자보다 함께하면 더 재밌어요.”
배드민턴에 푹 빠진 이영미 작가의 다음 목표는 탁구다. 또 다른 도전 영역이다. 오늘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라고 하지 않나.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이하기 가장 알맞은 건 오늘이다.
선수현│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