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각 녹색의 코트에서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이 한국 테니스의 새로운 역사가 되고 있다.
1996년생으로 올해 스물두 살인 젊은 청년 정현(58위·한국체대)이 일천했던 한국의 테니스 역사를 새롭게 써 내려가고 있다. 그는 지난 1월 24일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새해 첫 메이저대회인 호주오픈(총상금 약 463억 원) 남자단식 8강전에서 돌풍의 주역이었던 테니스 샌드그렌(미국)을 3-0(6-4 7-6<5> 6-3)으로 완파하고 준결승에 진출해 한국 테니스의 역사를 또 한 번 새로 고쳐 썼다. 이미 지난 22일 전 세계 랭킹 1위였던 조코비치(14위·세르비아)를 꺾고 8강에 진출하면서 한국 테니스 사상 첫 ‘메이저 8강’의 신기원을 이뤄낸 지 불과 이틀 만에 첫 ‘메이저 4강’이란 신기록을 만들어낸 것이다.
승리를 확정한 정현은 감격에 겨운 듯 한동안 코트를 떠나지 못하고 두 팔을 높이 들어 감격의 순간을 만끽했다. 그러고는 호주오픈 메인 코트인 로드 레이버 코트를 빠져나가던 정현은 사인펜을 들고 자신을 기다리는 카메라를 보고 씩 웃으며 한글로 ‘충 온 파이어!’라고 적었다. 자신의 이름 정현을 영어로 표기할 때 사용하는 ‘CHUNG’과 함께 ‘불이 붙었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On fire’를 한글로 옮겨 적은 것으로, 자신의 기세에 불이 붙었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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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은 파죽지세, ‘도장 깨기’의 표본
실제로 그랬다. 정현은 이번 호주오픈에서 자신의 표현처럼 활활 타올랐다. 더 이상 메이저 대회 1승에 목말라하던 예전의 정현이 아니었다. 그는 이번 대회에서 64강, 32강, 16강, 8강 고지를 차례로 점령했고 파죽지세로 4강까지 오르며 무패행진을 이어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보다 순위가 높은 강자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경기를 펼쳤다.
1회전에서는 미샤 즈베레프(35위·독일)를 상대로 2세트까지 일방적인 경기를 펼친 끝에 기권승을 거뒀고, 2회전에서는 다닐 메드베데프(53위·러시아)를 3-0(7-6 6-1 6-1)으로 가뿐히 제압했다. 그리고 3회전에서는 세계 랭킹 4위인 알렉산더 즈베레프(독일)를 풀세트 접전 끝에(5-7 7-6<3> 2-6 6-3 6-0) 제압했다. 처음으로 세계 랭킹 10위 이내 선수에게 거둔 승리이자 생애 첫 그랜드슬램 16강 진출이었다. 이는 이덕희(1981년 US오픈)와 이형택(2000년과 2007년 US오픈)이 세웠던 한국 선수 그랜드슬램 최고 성적(16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기록이었다.
정현의 강적들을 상대로 한 ‘도장 깨기’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지난 22일 마침내 자신의 우상이었던 거함 조코비치까지 무너뜨리며 한국 선수 누구도 밟지 못했던 ‘메이저 8강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조코비치가 누구인가. 그는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코트의 절대강자로 통했던 전 세계 랭킹 1위였고 현재 테니스를 대표하는 ‘빅4’ 중 한 명이다. 그의 플레이를 보며 테니스 스타를 꿈꿨던 어린 시절 정현의 ‘우상’이기도 했다. 그런 강자를 상대로 정현은 3-0(7-6<4> 7-5 7-6<3>) 완승을 거둬 TV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세계 테니스 팬들을 경악케 만들었다. 한국 최초의 메이저대회 8강 진출이라는 신기원을 이룬 정현에게 다음 상대인 샌드그렌은 새로운 역사를 위한 희생양이 됐을 뿐이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세계 랭킹 100위권 밖으로 추락하며 깊은 슬럼프에 헤맸던 정현이었다. 그 짧은 시간 무엇이 그를 이렇게 변화시켰을까. 2014년 프로에 데뷔하자마자 두각을 보였던 정현은 이듬해 세계 톱 100에 진입하더니 그해 연말 랭킹을 51위까지 끌어올리며 차세대 주자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2016년 뜻밖의 부상과 컨디션 난조로 약 4개월의 공백 기간을 가져야 했다. 세계 랭킹에서도 다시 10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주저앉을 뻔한 그 순간 정현은 돌연 투어 중단을 선언했다. 그토록 바랐던 리우올림픽 티켓까지 반납하고는 4개월 동안 잠수를 탔다. 정현은 그렇게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정현은 이 시간을 방황으로 허비하지 않았다. 스스로 바닥까지 내려가 기본부터 다시 다졌다. 초심으로 돌아가 자세 교정을 했고 또 전 테니스 국가대표인 박성희 박사와 정기적인 심리 상담을 통해 정신력을 새로이 무장했다. 그리고 4개월 후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더욱 단단해져 코트에 복귀했다. 정현은 지금도 기회가 될 때마다 “그 시기가 저에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슬럼프 때 대회 출전에 급급했다면 지금의 정현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 1월 24일(현지시간)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호주오픈 테니스대회 남자 단식 8강전에서 한국 테니스의 간판 정현(58위)이 미국의 테니스 샌드그렌(97위)에 승리를 거둔 뒤 미소짓고 있다. ⓒ연합
한국을 넘어 아시아 테니스 역사를 새로 쓸 기세
시련이란 좋은 약을 먹은 정현은 2017년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에 복귀해 여러 차례 자신보다 랭킹이 높은 상대를 무너뜨리며 존재감을 보이더니 지난해 11월에는 ATP 투어 넥스트 제너레이션 파이널스에서 우승하며 화룡점정을 찍었다. 이 대회는 21세 이하 젊은 선수 8명이 출전해 기량을 겨루는 무대였는데 당당히 정상에 올라 ATP 투어가 공인한 ‘차세대 간판’으로 인정받았다. 생애 첫 ATP 투어 대회 우승으로 정현의 자신감은 용광로처럼 끓어올랐고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가 이어져 이번 호주오픈 대이변의 원동력이 됐다.
정현은 이제 한국을 넘어 아시아 테니스 역사를 새로 쓸 기세다. 호주오픈에서 아시아 선수가 4강에 진출한 것은 1932년 일본의 사토 지로 이후 86년 만이다. 아시아 선수 중 테니스 4대 메이저 대회(호주오픈·프랑스오픈·윔블던·US오픈)에서 정현보다 나은 성적을 기록한 선수는 2014년 US오픈 준우승을 차지한 일본의 니시코리 케이가 유일하다. 이는 현재까지 메이저 대회에서 아시아 선수가 기록한 최고 성적이다. 20대 초반의 한국 선수 정현은 이제 그 기록을 깰 수 있는 유일한 선수로 주목받고 있다.
정현의 메이저 4강 진출에 대해 미국 <뉴욕타임스>는 “정현은 페더러, 조코비치 등이 은퇴한 후 테니스계의 ‘카리스마 공백’을 채워줄 선수”라고 극찬하면서도 “테니스가 비인기 종목인 한국에서 신문 1면을 휩쓸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테니스는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스포츠이지만 한국에서는 비인기 종목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정현은 이제 프로테니스 불모지인 한국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레전드가 되고 있다. 여자 프로골프의 박세리, 메이저리그 박찬호, 피겨퀸 김연아와 다르지 않다. 골프 여왕 박세리를 보고 꿈을 키운 ‘박세리 키즈’들이 지금 세계 여자 골프를 호령하듯 앞으로 ‘정현 키즈’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는 ‘테니스 불모지’ 한국을 테니스 강국으로 변화시키는 자양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정현 프로필
•출생 1996년 5월 19일(경기 수원)
•신체 188cm, 83kg
•주요 경력 및 수상
-2011년 제주 국제주니어테니스대회 남자 복식 우승, 오렌지보울 국제주니어테니스대회 16세부 남자 단식 우승
-2012년 인도 국제주니어 1차대회 남자 단식 우승, 제20회 오펜바흐 국제주니어테니스대회 남자 단식 우승
-2013년 윔블던 주니어테니스대회 남자 단식 준우승, ITF 남자퓨처스대회 남자 단식 우승
-2014년 제17회 인천 아시안게임 테니스 남자 복식 금메달
-2015년 제28회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테니스 남자 단식. 남자 단체전 금메달, 남자 복식 은메달
-2016년 ATP 효고 노아 챌린저 테니스 남자단식 우승, ATP 가오슝 챌린저 테니스 남자단식 우승
-2017년 2017 넥스트 젠 ATP 파이널스 우승, ATP 마우이 챌린저 테니스 남자 단식 우승
-2018년 1월 24일 호주오픈 남자단식 4강 진출
유인근│스포츠서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