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올림픽이 한창이던 2008년 어느 날이었다.
매일같이 그려왔던 올림픽 시합장 매트 위에 진짜로 내가 서 있었다. 나를 향한 박수와 함성, 그리고 울려 퍼질 것만 같은 내 심장 박동 소리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당시만 해도 올림픽 리듬체조 출전 자체가 기적이었다. 나는 만 열여섯 살에 불과한 최연소 선수였고, 한국 선수로는 16년 만에 자력 출전권을 가지고 올림픽 무대에 올랐다. 더군다나 한국에서 리듬체조는 비인기 종목이었다. 올림픽 출전을 꿈꾸는 나에게 모두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해냈다’고 보란 듯이 자랑하고 싶었다. 매번 네 종목 중 한 가지는 크게 실수하는 탓에 종합점수가 내려가곤 했는데, 올림픽 때는 ‘실수하지 않겠다’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누군가 자고 있는 나를 깨워 당장 작품을 하라고 해도 완벽하게 해낼 수 있을 만큼 지독하게 연습했기 때문이다.
경기장에 들어서니 기구 말고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볼이나 후프는 잠시만 눈을 떼도 날아가버리는 탓에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경기장 주변 관객석 소리를 잘 듣는 편이다. 그날도 그랬다. 경기장 티켓을 겨우 구한 부모님이 경기장 가장자리에서 응원하는 목소리가 귀에 콕콕 박혔다. 결과적으로 모든 종목을 깔끔하게 성공했고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리본 종목에서 제일 높은 성적을 거둔 것으로 기억한다. 최고로 재미있고 짜릿한 시합이었다. 무엇보다 선수로서 최종 목표를 이뤘다.
따지고 보면 내 꿈은 꽤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여덟 살 때 우연히 보게 된 리듬체조 중계방송이 계기였다. 믿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빨간 리본을 든 채 연기하는 선수를 보고 외쳤다. “아! 이건 내 것이다.” 케이크 상자 장식용 빨간 끈에 나무 막대기를 붙여 어설픈 흉내를 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3년 동안 부모님을 조른 끝에 열한 살이 돼서야 리듬체조를 배울 수 있었다.
늦은 시작이었다. 때문에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다. 매일 열 시간 넘게 운동했다. 고통의 정도만 달랐을 뿐 단 하루도 몸이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한쪽 다리로 지탱한 상태에서 세 바퀴 정도 회전하는 기술(백일루션)이 있는데, 나는 유일하게 아홉 바퀴를 도는 선수였다. 엄지발가락이 두 번째 발가락 안으로 밀려들어가는 무지외반증을 앓게 될 만큼 훈련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백일루션은 내가 존재하고, 내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 배경이 됐으니 말이다.
어느 선수나 마찬가지겠지만 나에게도 은퇴의 순간은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리듬체조는 민첩성과 유연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신체 변화가 중요하다. 스물한 살이 된 나는 더 이상 예전처럼 활동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베이징올림픽 이후, 그전까지 미친 듯이 잡고 있었던 것들을 서서히 내려놓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일말의 아쉬움도 남지 않았다. 오히려 인생 2막에 들어선다는 기대감이 컸다.
20대 끝자락에 선 지금 나는 볼링 선수로 또 다른 삶을 펼치려 한다. 볼링은 은퇴 이후 열정을 다시 가져다준 운동이다. 2014년 프로 볼링 선수로 데뷔했지만, 꼭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어서인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는 과정이 더욱 새롭기까지 하다. 기회가 닿는다면 지도자의 삶도 도전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신수지를 꿈꿔본다.
신수지│전 리듬체조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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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