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살. 늘 분주하게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팔자를 일러 ‘역마살이 끼었다’고 말한다. 김동리의 단편 ‘역마’에서도 그런 운명을 지닌 사내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꼭 역마살이라고까지 말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나 역시 그런 팔자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할 때가 많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한 이래 무수히 거처를 옮겨야 했다. 2년 계약으로 세를 얻어 들어가도 그 기간을 제대로 채우기 전에 이사할 사정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임대인이 파산해 보증금도 돌려받지 못한 채 나서야 했던 때도 있었고, 이사 당일 도착했는데 책짐을 본 주인이 그 많은 책을 어떻게 들이냐며 계약을 없던 걸로 하자고 해 눈물을 머금고 짐차를 돌린 적도 있었다. 그야말로 지상의 방 한칸을 구하기가 참으로 쉽지 않던 때가 있었다.
결혼하고 나서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직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사한 것은 그렇다 쳐도, 왜 그리 이사할 일이 많았는지 모르겠다. 심지어는 외국에서 방문 연구를 할 때도 이사할 일이 생겨 고생스레 짐을 옮겨야 했다. 근자에는 A시에서 겨우 4개월, B군에서 7개월을 살다 이사했다. 모두 처음 들어갈 때는 오래 살아야지 하고 결심했지만, 막상 살다 보면 ‘역마’의 상황이 되거나 역마살이 도졌다. 부동산 중개료를 내가 부담한다하더라도 임대인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마땅치 않은 임차인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러다 보니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면 그 숱한 이사 이력들이 그대로 드러난다.
떠도는 자의 우편번호는 상처와 우수(憂愁)의 흔적이기도 하다. 어떤 때는 책을 제대로 정리도 하기 전에 또 짐을 꾸려야 했는데, 그럴 때는 참으로 한심한 느낌이었다. 간혹 정주민의 시대를 넘어서 유목민의 시대가 도래했는데 이사 자주 하는 게 뭐가 문제냐고 호기를 부려보기도 했지만, 속절없이 떠도는 노마드의 풍경이 그리 아름다울 수만은 없었다.
지난가을 또 이사를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다섯 번째 우리 집 이사를 해준 이사업체 직원들이 "이제는 좀 오래 사시지요. 우리야 일이 생겨 좋지만 이렇게 자주 이사하는 것은 좀 심하잖아요? 돈도 시간도 많이 들고!" 그랬다. "예, 저도 이번에는 평생 옮기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아예 이 집에서 생을 마치려고요." 그렇게 대답하며 정말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pixabay
더 이상의 이사는 없다, 그런 생각, 그런 결심으로 새집을 애지중지 아껴주려 애쓴다. 집 안 구석구석에 정을 붙이고 창밖의 풍경 하나하나에 마음을 준다. 뒷산에서 단풍이 들고 절정으로 치솟다가 시나브로 낙엽이 질 때, 그 풍경들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두근두근 감동하며 "이 집 너무 좋다" 그런 말을 연발하면서 정착에 대한 의지를 다진다. 멀리 아주 조금 보이는 한강의 풍경도 엄청난 축복처럼 여긴다. 안개가 낀 날은 뭔가 신비로운 비밀을 간직한 듯한 풍경을, 쾌청한 날은 또 그런 날대로 은총의 정경을 느낀다. 나날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주민이 되기 위한 행복 연습을 계속하고 있다. 성가신 역마살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나를 편안하게 보호해주는 공간, 그리고 내가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공간, 그런 공간 감각으로 나날의 삶을 충만하게 했으면 좋겠다. 더는 떠돌지 않고 이 집에서 어떤 필생의 작업을 수행했으면 좋겠다. 꼭 그랬으면싶다. 현주소가 내 삶의 최종적인 우편번호이기를 바란다. 정말이지 이 집에서 오래 살고 싶다.
글· 우찬제(서강대 교수·문학평론가) 2016.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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