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맥주병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한국, 일본, 중국의 맥주병은 전통적으로 두서너 명이 나눠 마실 수 있는 크기이지만, 서양은 딱 한 사람이 마실 수 있는 사이즈다. 동양인은 함께 자리한 '우리'를 최소 단위로, 서양인은 비록 여럿이 있더라도 '나', 즉 개인을 최소 단위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한국인은 우리나라, 우리 학교, 우리 회사와 같이 '우리'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심지어 '우리 남편', '우리 아내'라는 말까지 있다. 영어로 번역할 경우 남자 여러 명이 한 명의 아내를 공유한다는 의미가 되니 황당하기 그지없다.
이처럼 서양과 동양은 여러 면에서 다른 길을 걸어왔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서양은 내가 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지만 동양은 나라가 잘되고, 내가 다니는 회사가 잘돼야 나도 잘된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적 사고가 깊이 깔렸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유식한 말로 공동체 자본주의라고 한다.
최근 서구의 가치들이 급격히 유입되면서 동양적인 가치가 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된장 뚝배기를 식탁 중앙에 놓고 같이 떠먹었으나 요즈음에는 각자 그릇에 덜어 먹는다. 맥주병 사이즈도 그 예다. 서울 홍대입구나 신촌, 강남역 인근의 카페에서 두서너 명이 마실 수 있는 맥주병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세 단계만 거치면 알 수 있다는 촘촘한 한국인의 인간관계 속에 이웃의 기쁨과 슬픔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이는 한국인 특유의 공동체주의에 기인하고 있으며 서구의 시대정신(Zeitgeist)보다 외려 더 강하게 나타난다. 자신을 소개하라고 하면 서양인은 '자신이 어떠어떠하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한국인은 '친구들과 잘 어울린다', '직장 생활이 원만하다'는 등의 공동체 속에서의 자신을 언급한다.
한국인은 교통사고가 나면 사고로 빚어진 교통 체증까지 자기 책임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서양인은 사고 그 자체에만 책임감을 느낀다. 집단주의가 팽배한 일본은 더 심하다. 정시에 기차를 운행하지 못한 기관사가 책임을 통감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이처럼 동양인, 나아가 한국인에게는 사회와 더불어 생각하는 뿌리 깊은 전통이 있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얽히고설켜 지지고 볶으며 사는 한국인에게 올 한 해도 쉽지 않았다. 메르스 사태에 온 나라가 덜덜 떨었고, 지구 반대편 파리 테러로 또 한 번 놀랐다. 이산가족의 상봉을 보며 모두가 눈시울을 적셨고, YS를 떠나보내며 한 시대가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경제는 아직 침체 국면이고, 정치권도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인에게 지난 일년은 기쁨보다는 슬픔이 많은 한 해였다.
연말이다. 거리에 '올드 랭 사인' 노래가 울려 퍼진다. 새해라고 흥분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한 해가 훌쩍 흘렀다. 삶이란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얼마 남지 않게 되면 점점 빨리 돌아가게 된다. 마음은 아직 '연분홍 치마가 휘날리는 봄날'에 서성거리고 있는데 시간은 우리를 한 해 맨 끝자락에 세워두고 있다. 한 해의 끝자락, 보내지 못할 미련과 안타까움이 있지만 이제 우리는 2015년을 보낼 채비를 서둘러야겠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잠들기 전에 가야만 할 먼 길이 있다(and the miles before I sleep)'며 고단한 삶의 영속성을 얘기했다. 새해에는 더불어 다 같이 행복한 삶을 소망하고 싶다. 모두에게 슬픔보다 기쁨이 많은 행복한 2016년을 꿈꾸고 싶다.
글 · 김동률(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2015.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