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을 맞이해 우리말의 변천에 대해 알아보려고 해. 최근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게시된 '2016학년도 어른이평가시험'이란 걸 봤는데, "신조어 몇 개까지 알고 있니라고 질문하며 26개의 낯선 단어를 나열했더라고. 복세편살, 별다줄, 핑프, 더럽, 세젤, 연서복, 걸크러쉬 등등. 구보 씨는 딱 하나밖에 못 맞혔으니 '어른이(어린이와 통하는 어른)'가 되긴 어렵겠네.
▷어른이평가시험 문제와 정답
돌이켜보면 우리말은 정말 많이 변했어. 그래도 어른이 시험문제는 어려워도 너무 어려워. 정답지를 보니 '복세편살'은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 '연서복'은 '연애에 서툰 복학생'의 줄임말이라네. 이게 우리말인지, 외국 말인지, 무슨 암호인지 알 수가 없어. 요즘 세대의 언어나 화법은 우리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졌어. 신조어가 너무 많이 생겨 아름다운 한글의 파괴 정도가 정말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시대별 유행어의 변화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영역에 걸쳐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야. 광복 직후부터 1950년대 말까지는 38따라지, 골로 간다, 빽, 급행료, 국물, 낙하산부대 같은 말이, 1960년대엔 사쿠라, 낮엔 야당 밤엔 여당, 자의반 타의반 같은 말이 회자됐어.
1970년대엔 뺑뺑이 세대, 치맛바람, 애나 봐라 같은 말이, 1980년대엔 큰손, 심증은 가나 물증은 없다 같은 말이 유행했고, 1990년대엔 신토불이, 신세대, 쉰세대 같은 말이 눈길을 끌었어. 2000년대 이후엔 인터넷의 발달로 수많은 유행어가 생겨났지만 반짝 인기를 끌다 사라져갔지.
컴퓨터와 휴대전화가 보편화되면서 '낼(내일)', '설(서울)' 같은 타이핑하기 편한 축약형 신조어도 많이 나왔어. 메신저를 보낼 때 썼던 '방가방가' 정도는 귀여운 맛이 있었어. 구보 씨도 손녀한테 배워 셀카(셀프카메라), 멘붕(멘탈 붕괴),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 미존(미친 존재감) 정도는 알고 있었어. 그런데 #G(시아버지), 윰차(유모차), 헬조선(지옥 같은 조선),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 심쿵(심장이 쿵쾅거릴 정도로 좋음), 핵꿀잼(정말 재미있다), 핵노잼(No+잼, 정말 재미없다), 핵인정(격하게 인정한다), ㅇㅈ(인정), ㅁㅈ(맞아) 같은 말은 통 알 수가 없어.
채팅 발달로 축약어 유행
우리말 왜곡 안타까워
사실 언어의 변화는 그만큼 빠른 우리 사회의 변화를 말해주지. 언론과 방송에선 1990년대 말부터 제목과 자막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축약어를 썼어. 그와 동시에 인터넷 채팅이 발달하면서 축약어가 대폭 늘기 시작했어. 방송이나 온라인상에서도 이런 세태를 반영해 서로 다른 세대들이 즐겨 쓰는 단어의 뜻을 맞혀보는 프로그램들이 나오고 있어. 방송의 '알랑가몰라' 코너나 인터넷의 '그말모지?(mozi.it/word)' 같은 누리집이 아마 대표적일 거야. 구보 씨도 손녀가 '안 알랴(안 알려)'줬으면 이런 게 있는지도 몰랐을 거야.
▷2011년 8월 국립국어원이 복수표준어로 인정한 '짜장면'
복수 표준어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도 중요한 변화야. 그동안 한 가지 뜻을 지닌 다양한 표현을 복수 표준어로 인정하면 혼란을 일으키기 쉽다며 단수 표준어만 인정했다는 건 다 알 거야. 그러다 2011년 8월 31일 국립국어원이 '자장면'만 표준어로 삼는다는 원칙을 바꿔 '짜장면'도 복수 표준어로 인정한다고 밝혔어. 1986년 외래어 표기법 고시 이후 25년 만에 바뀐 거지.
인터넷상에서 '짬뽕'은 표준어로 인정되는데 왜 짜장면은 안 되냐는 질타가 이어졌고 온라인 청원방까지 생겨 국립국어원이 현실을 반영한 거지. 그때 짜장면처럼 현실에서 많이 쓴다는 이유로 간지럽히다(간질이다), 허접쓰레기(허섭스레기), 맨날(만날), 복숭아뼈(복사뼈), 묫자리(묏자리), 먹거리(먹을거리) 같은 말이 복수 표준어로 인정됐어.
지난 7월 8일엔 국립국어원에서 개방형 한국어 지식 대사전('우리말샘')으로 표준어로 통합한다고 발표했어. 개방형이란 국민들이 생각했을 때 부족하거나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종합적으로 판단해 사전에 반영하겠다는 취지야.
국립국어원은 '몸매가 착하다', '가격이 착하다', '니가', '이쁘다' 등의 말을 표준어로 인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어. 그러자 '몸매가 착하다', '가격이 착하다'를 표준어로 인정하느냐 마느냐를 둘러싸고 대논쟁이 벌어졌어. 하지만 언어의 사회성 측면에서는 환영할 만한 조치라고 생각해. '우리말샘'은 다변화된 사회에서 표준어 외에도 다양한 실생활 언어 정보가 반영돼 제작된다고 하니 꽤 기다려지네.
부부간 호칭어도 '여보→자기→오빠' 순으로 바뀌었대. 국립국어원이 광복 70주년을 기념해서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이런 분석이 나왔어. 광복 직후부터 1950년대 말까지는 아내가 남편을 '영감'이나 '양반'이라 불렀고, 남편은 아내를 '임자'나 '마누라'라고 했어. 근데 1960년대 들어서는 '여보', 1970년대 이후엔 '자기', 지금은 '오빠'라는 식으로 변했으니 '오빠' 다음엔 뭐라고 바뀔까?
직장에서도 호칭은 변해왔어. 광복 직후엔 이사 직급을 취체역(取締役)이라고 했어. 대표이사는 대표취체역이었지. 지금은 부장, 차장, 과장 같은 직급의 호칭을 버리고 '님'으로 통일하거나, '님'이라는 전형적 호칭 외에 '리더', '프로', '파트너', '매니저' 같은 영어식 호칭을 도입한 기업들이 는다고 해. 조직문화의 창의성을 강조한다며 사내의 직급 호칭을 과감히 버리고 '호칭 민주화'를 시작한 거지. 이런 변화는 바람직한 거 같아.
아무튼 신조어를 많이 아는 게 젊은이와 소통하는 지름길일지 모르겠지만 우리말의 왜곡이 너무 심해 안타까울 뿐이야.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뜻이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 서로 통하지 못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인데, 신조어 때문에 되레 문자의 뜻을 알기 어렵고 너무 왜곡되니 지나친 신조어 만들기는 삼갔으면 해. 구보 씨도 젊은이들 투로 말해볼게. "한글아, 스릉흔드('사랑한다'를 이 꽉 물고 발음한 것)."
*이 시리즈는 박태원의 세태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년)의 주인공 구보 씨가 당시의 서울 풍경을 이야기하듯이, 우리가 살아온 지난 70년의 기억을 톺아본 글이다.
글 · 김병희(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전 한국PR학회장)
2015.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