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의 여름 여행을 말하기 전에 내가 살아온 이야기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래야 내게 가족여행과 그 여행지가 얼마나 소중하고 특별한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아내는 내 제자였다. 경희대 체대를 졸업한 뒤 김포 양곡종합고등학교에서 처음 교편을 잡은 나는 아내가 만 열아홉 살이던 1975년 10월 웨딩마치를 울렸다. 아내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8개월 만에 새색시가 됐다. 아마도 결혼식장에서 ‘도둑놈’ 소리를 나처럼 많이 들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혼하던 해 나는 서울 환일고등학교로 근무지를 옮겼다. 서울 용문동 집에서 김포까지 출퇴근하는 게 너무 힘든 데다 좀처럼 아내 얼굴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근은 ‘교사 하일성’이 ‘야구해설가 하일성’으로 변신하는 계기가 됐다.
1979년 초여름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들어가는데 오관영 KBS 배구해설위원이 한마디 툭 던졌다. “하 선생, 텔레비전에 한번 나가 보지.” 대학 선배이자 선배 교사였던 오 위원은 우스갯소리를 아주 잘했다. 당연히 농담으로 여겼다. 하지만 오 선배는 진지했다. “농담 아니야, 해설자 한 명 추천해 달라는데 하 선생이 제격일 것 같아서. 야구선수 출신이고, 입담도 좋으니 잘할거야.” 오 선배의 손에 이끌려간 곳은 동양방송(TBC)이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야구 해설이 올해로 만 35년 됐다. 35년 동안 전국의 야구장을 누비고 다니다 보니 가족여행 같은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남들에게 여름은 휴가의 계절이지만 야구해설가에게는 가장 바쁠 때다. 2006년부터 3년간은 마이크를 놓고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으로 재직했는데 그때는 해설가 때보다 더 바빴다.
제대로 된 가족여행은 큰딸이 초등학교 6학년, 작은딸이 초등학교 5학년이던 1988년 7월이 처음이었다. 물론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우리 가족은 변변한 여행 한번 다녀오지 못했다. 그래서 1988년 제주도 여행은 내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가족 모두 함박웃음 짓게 한 ‘조랑말 체험’
우리는 각자 배낭 하나 짊어지고 제주도로 날아갔다. 넷이 집을 떠나서 함께 생활해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도, 아내도, 딸들도 낯설었지만 한편으로는 많이 설레었다. 제주도는 한국땅이지만 이국적이어서 더 좋았다. 하와이 못지않게 아름다운 섬이 제주도 아니겠는가.
공항 문을 열고 제주도 땅을 밟으니 냄새부터 달랐다. 짭조름한 바다 내음에 마음까지 상쾌해졌다. 서귀포에서 우리는 ‘조랑말 체험’을 즐겼다. 딸들은 난생 처음 보는 말을 무서워하면서도 신기해 했다. 나와 아내는 아이들을 보듬어 말에 태웠다. 말 등에 오른 아이들은 마냥 즐거워했다. 아이들에 이어 아내도 말을 탔다. 연신 손사래를 치던 아내였지만 막상 말에 오르자 함박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닌 우리 가족은 해거름에 지인이 운영하는 횟집에 들어갔다. 주인장은 제주도에서만 잡힌다는 다금바리회를 한 접시 가득 내왔다. 바다 위 노을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소주 한 잔 곁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잘하는 노래도 아니지만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다금바리회만으로는 좀 서운하다 싶을 때 주인장의 ‘특별 서비스’가 나왔다. 직접 배를 몰고 나가서 잡아온 은복이었다. 담백한 맛과 부드러운 육질의 은복은 우리 가족의 입을 더없이 행복하게 해 줬다. “아빠, 우리 제주도에서 살아요.” 작은아이는 한사코 떼를 썼다. 그러던 둘째가 시집간 지도 벌써 6, 7년이 지났으니 세월이 흐르긴 흐른 모양이다.
26년 전 가족여행을 다녀온 뒤로도 나는 여러 차례 제주도에 갔다. 모두 업무차 출장이었다. KBO 사무총장 재직 시절에는 제주도에서 프로야구 경기를 유치한 적이 있다. 일 때문에 갔던 터라 다른 데 눈 돌릴 틈이 없었지만 제주도는 제주도였다. 변한 것은 제주도를 찾는 사람들뿐이었다.
1949년생인 나는 올해 66세다. 4년 뒤면 칠순이다. 건강이 허락된다면 칠순 때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다녀오려 한다. 26년 전에는 네 명뿐이었지만 지금은 사람이 많이 늘었다. 사위들도 얻었고 손주들도 생겼다.
얼마 전 딸들과 사위들에게 작은 ‘포부’를 공개했더니 다들 손뼉을 치며 환영했다. 4년 뒤를 위해 지금부터 열심히 돈도 모으겠다고 약속했다. 30년 만에 다시 가게 될 제주도 가족여행, 벌써부터 많이 설렌다. 조랑말들은 잘 있는지, 저녁 노을은 여전히 아름다운지, 횟집 주인장의 인심은 변치 않았는지….
다금바리회 한 접시 놓고 제주도를 원없이 즐기고 싶다.
글·하일성(야구해설가·스카이엔터테인먼트 대표·전 KBO 사무총장) 2014.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