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동대문 점포에서 볼일을 마치고 들어가는 중입니다."
롯데마트 서울역점에서 만나기로 한 탈북민 정혜영(46) 씨는 급한 볼일로 동대문 점포를 다녀오면서 기자에게 이렇게 전했다. 요즘 정 씨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하루 24시간을 쪼개가면서 바쁘게 살고 있다.
남한으로 온 지 이제 2년밖에 안 됐지만 그는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5개(롯데마트 서울역점, 홈플러스 동대문점, 홈플러스 일산점, 홈플러스 신도림점, 홈플러스 부천상동점)의 옷 수선 점포를 운영하고 있는 사장님이다.
많은 탈북민이 창업에 실패하는 등 정착에 애로를 겪고 있는 데 반해 정 씨는 남한에 사는 사람들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빠른 시간 안에 자리를 잡았다. 이에 대해 정 씨는 "정부가 탈북한 사람들을 모두 귀중하게 여겨주고, 빨리 정착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줬다"면서 "특히 중국에 두고 온 아이들을 데려오기 위해 최대한 빨리 정착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브로커에게 300만 원 쥐여주고 고생 끝에 도착한 한국
인천공항 도착 후 휘황찬란한 불빛에 눈물 흘려
정 씨는 북한에 있을 때부터 경영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북한의 유명 제철소에서 사람들을 관리하고 업무가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총지휘하는 팀장 역할도 했다. 남부럽지 않던 그의 삶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고 난 후부터였다.
배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정 씨가 살고 있던 동네에서만 하루에 수백 명이 굶어죽었다. 회사들이 문을 닫았고, 가정은 파탄 났으며, 아이들은 학교를 가는 대신 먹을 걸 구하러 다녔다. 수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을 찾아 중국으로 탈북을 감행했다. 정 씨도 그때 중국 국경을 넘었다.
"1999년에는 지금처럼 경비가 삼엄하지 않아서 비교적 수월하게 국경을 넘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중국으로 넘어간 북한 여자들 대부분은 인신매매로 팔려갔죠. 저 역시 중국의 시골 가난한 농부에게 팔려갔어요.
천막으로 지어진 허름한 집에서 대화가 안 통하는 사람들과 살려니 앞이 캄캄했죠.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방법을 모르니 도망칠 수도 없었어요."
▶정혜영 씨는 “정부가 정착에 많은 도움을 줬다”며 “열심히 일해서 통일이 되면 북한에 도 옷 수선실을 차리고 싶다”고 말했다. ⓒ김도균 기자
그렇게 정 씨는 중국 산골에서 두 아이를 낳으며 10여 년을 살았다. 그러던 중 2009년 남편이 골수암으로 사망하면서 남한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시부모님을 모셔달라"는 남편의 유언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 후로 5년여 동안 치매에 걸린 시부모를 모시며 남한으로 갈 시기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2014년 여름, 먼저 남한으로 간 지인들로부터 "남한으로 빨리 와서 밝은 세상에서 살라"는 권유를 받고 중국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물론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길은 멀고 험난했다. 브로커에게 현금 300만 원을 쥐여준 뒤 라오스, 태국 등을 거쳐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향했다.
"라오스에서 군인에게 잡혀 북한으로 끌려가는 줄 알았는데, 함께 있던 사람들이 현금을 모두 털어서 군인을 매수했죠. 그 덕에 라오스에서 풀려나 산속에서 한 달간 숨어 지내며 다시 남한으로 갈 계획을 짰죠. 정말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한 거죠. 그런 우여곡절 끝에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보니 신세계가 따로 없더라고요. 사방이 번쩍번쩍 깨끗하고 으리으리했죠. 아, 내가 정말 잘 왔구나 싶어서 펑펑 눈물을 쏟았어요."
"북한 여자가 뭘 안다고?"라는 편견 속 자립
통일되면 북한에도 수선실 차리는 게 꿈
북한에서는 어릴 때부터 남한의 자본주의를 맹비난하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남한에 가면 자본주의 사업가들에게 돈과 노동을 착취당하며 사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남한 정부와 사람들은 정 씨를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줬다. 먹고살기 힘든 북한 사람들은 매사에 부정적이고 까칠한 말투인데 남한 사람들은 친절하고 밝았다.
"중국에서 집도 없이 힘든 생활을 했는데, 남한에 오니까 우선 살 수 있는 임대주택을 주더라고요. 초기 정착금으로 400만 원을 한 번에 받고, 300만 원을 3개월 동안 분할해서 받았어요. 이후 6개월 동안 매달 48만 원씩 생계비도 받았죠. 목숨을 걸고 왔고, 남한 정부에서도 이렇게 지원해주는데 못살면 어떻게 합니까. 여기는 노력하는 만큼 잘살 수 있는 곳이잖아요. 그래서 이를 악물고 열심히 했죠."
정 씨는 하나원에서 무엇을 하며 먹고살지 고민하던 중 중국에서 옷 수선을 하던 경험을 살려보기로 했다. 남북하나재단이 운영하고 있는 ‘의류 리폼 및 수선과정’에 등록해 리폼과 재봉 기술을 배웠다. 매사 열정적으로 일하고 배우는 정 씨에게 재단 측은 롯데마트 서울역점 안에 있는 의류 수선실에 취직할 수 있도록 연계해줬다.
"월급을 받으며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매장의 점주가 수선실을 내놓은 것을 보고 ‘내가 직접 운영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마침 중국에서 모아놓은 자본금이 조금 있었거든요."
물론 처음에는 직원들 월급을 주느라 정 씨는 한 푼도 가져가지 못했다. 하지만 한 달에 두 번 이상 쉬지 않고 일한 덕분에 어느 순간 수익이 나기 시작했다. 매번 적자를 내던 수선실에서 몇 달간 흑자를 기록하자 다른 지역의 수선실을 운영하던 회사에서 정 씨에게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그렇게 50:50의 수익을 나누는 구조로 정 씨는 총 5개의 의류 수선실을 운영하게 됐다.
"제가 이를 악물고 빨리 자리 잡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중국에 있는 아이들을 데려오기 위해서였죠. 딸이 열일곱 살, 아들은 열두 살이에요. 아이들에게 3국을 통해 오라고 하기엔 너무 위험해서 제가 공식적인 엄마임을 증명하고 데려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어요. 하지만 중국에서 혼인신고를 한 게 아니기 때문에 수차례 중국을 오가며 DNA 검사 등을 하면서 아이들의 친엄마임을 어렵게 증명하고, 1년 만에 겨우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다행히 아이들도 한국 사회에 서서히 적응해나가고 있다. 물론 처음에는 말과 문화가 다른 남한 생활에 힘들어했지만 이제는 "다시 중국으로 가고 싶지 않다"고 할 만큼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다. 덕분에 정 씨는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새로운 희망을 꿈꾸며 살 수 있게 됐다.
이제는 열심히 잘 사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5개의 점포를 운영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북한 여자가 뭘 안다고?"라며 대놓고 무시하는 사람들과도 조화롭게 어울려서 일을 해야 했고, 사람들 사이의 불화를 조율하는 것은 물론 직원들의 실수로 잘못 수선된 손님 옷값을 물어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정 씨에게 한국은 기회의 나라임이 분명했다.
"요즘 방송통신대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점포를 운영하고 아이들 돌보느라 힘들지만, 그래도 의상에 관해 제대로 배우는 게 좋을 것 같아 공부를 시작했죠. 제가 잘되면 남한에 온 탈북민들이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지금도 각 점포에 탈북민들을 채용하고 있어요. 통일이 되면 북한에도 이런 수선실을 차리는 제 꿈이랍니다."
글· 김민주 (위클리 공감 기자 ) 2016.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