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은 새 왕조 조선의 정궁으로 지어졌습니다. 하지만 문을 연 지 10년도 채 안 되어 불길한 기운이 도는 궁궐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태조 7년(1398)에 ‘1차 왕자의 난’이라는 골육상잔의 피바람이 일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태조 이성계는 상왕으로 물러나고 뒤를 이은 정종은 개경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정종의 뒤를 이은 태종은 한양으로 다시 천도했지만 경복궁으로 들어가기는 꺼림칙했겠지요. 그래서 지은 별궁이 창덕궁입니다.
▶ 창덕궁의 정문은 돈화문이다. 여러 궁궐 문 중 유일하게 다섯 칸인데, 좌우의 한 칸씩은 벽으로 막혀 있다. 황제가 아니면 다섯 칸짜리 문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윤상구
창덕궁은 조선의 임금들에게 가장 사랑받은 궁궐이었습니다. 임금들이 창덕궁을 선호한 이유는 왕자의 난 외에 하나가 더 있습니다. 평지에 지어진 경복궁에 비해 창덕궁은 숲과 산자락에 가려져 사생활 노출을 피할 수 있습니다. 남북을 중심축으로 질서정연하게 지어진 경복궁과는 달리, 창덕궁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지형이 생긴 대로 지어진 자연 친화적 궁궐입니다. 그래서 왕들이 더 편하게 느꼈던 것입니다.
창덕궁의 정문은 돈화문(敦化門)입니다. 돈화문의 문은 궁궐의 문 중 유일하게 다섯 칸입니다. 하지만 좌우의 한 칸씩은 벽으로 막혀 있지요. 황제가 아니면 다섯 칸짜리 문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궁궐의 정문을 웅장하게 지으면서도 중국의 시선을 의식한 것입니다. 돈화문은 임금의 출입이나 국가의 큰 행사가 있을 때만 사용하던 문이었습니다.
▶ 2 규장각은 학사들이 근무한 곳이다. 학문 연구와 개혁을 꿈꿨던 정조는 규장각에 대단한 애정과 관심을 가졌다. 3 금천 위에 놓인 다리 금천교. 금천은 궁궐의 안과 밖을 구분하고 상서롭지 않은 기운이 궁궐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준다는 의미를 지녔다. 4 규장각 옆에 있는 검서청은 책을 관리하는 검서관들이 근무하던 곳이다. 5 옥당은 홍문관을 말한다. 홍문관은 대궐 안의 서적을 관장하고 임금의 명령서인 교지를 작성하던 관청이다. ⓒ윤상구
돈화문을 들어서면 금천(禁川)이라는 시내[川]가 보이고 그 위에 금천교가 놓여 있습니다. 금천은 궁궐의 안과 밖을 구분하고 상서롭지 않은 기운이 궁궐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줍니다. 그래서 금천을 넘는 다리 금천교에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지요. 창덕궁의 금천교는 태종 11년(1411)에 지어진 것으로, 궁궐에 있는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다리입니다.
금천교 왼쪽에는 창덕궁이 세계문화유산임을 알리는 비석이 서 있습니다. 조선의 5대 궁궐 중 창덕궁만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그 기념비 뒤편으로 궐내각사(闕內各司)가 있습니다. 원래 조선의 관청들은 궁궐 바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업무 성격상 임금을 가까이 모셔야 하는 관청은 궁궐 안에 있었는데, 이들이 모여 있던 곳을 ‘궐내각사’라고 합니다.
궐내각사에 가려면 ‘내각(內閣)’이라는 커다란 현판이 걸린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내각은 ‘규장각’의 별칭이지요. 규장각에서는 학사들이 근무했는데, 학문 연구와 그를 통한 개혁을 꿈꿨던 정조는 이 기관에 대단한 애정과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규장각의 시설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고, 자주 이곳에 들러 학사들과 학문에 대해 토론을 펼쳤습니다. 또 규장각은 어필(御筆 : 임금의 글씨), 어제(御製 : 임금이 지은 글), 어진(御眞 : 임금의 초상화), 인장(印章 : 임금의 도장), 선원보첩(璿源譜牒 : 왕실의 족보) 등 임금을 기리는 물건들을 보관한, 왕실에서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규장각 옆에 있는 검서청은 책을 관리하는 검서관들이 근무하던 곳입니다. 서얼 출신은 관직에 나갈 수 없다는 관습을 없앤 정조 덕분에 실학자로 잘 알려진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등이 검서관으로 일할 수 있었지요. 규장각 뒤편에는 여러 채의 책고(冊庫)가 있습니다. 이곳은 책을 보관하는 장소로 검서관들이 관리하던 곳입니다.
규장각 뒤편에 있는 봉모당(奉謨堂)은 역대 임금의 글씨나 그림, 중국으로부터 받은 고명, 왕가의 족보 등을 모셨던 곳입니다. 규장각에는 정조의 물건들만 보관하고, 역대 임금의 유품은 모두 이곳으로 옮겼던 것이지요. 정조는 세자와 함께 매년 봄가을 좋은 날을 택해 이곳을 참배하였습니다. 봉모당 앞마당에는 천연기념물 194호로 지정된 커다란 향나무가 서 있습니다. 궁궐 안에서 여러 가지 제사를 지낼 때 이 향나무 가지를 깎아서 향을 피우기도 했답니다.
창덕궁의 궐내각사 중 약방(藥房)과 옥당(玉堂) 등도 그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내의원’이라고도 불렸던 약방은 임금과 그 가족의 건강을 책임지는 의료 기관이었지요. 약방의 주요 인력은 어의와 의녀 등 의료진이었지만, 그 우두머리는 의관이 아닌 문신이 맡았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국립병원의 원장을 의사가 아닌 일반 관리가 맡는 셈인데, 의관은 신분이 낮은 중인이어서 올라갈 수 있는 품계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옥당은 ‘홍문관’을 말합니다. 홍문관은 대궐 안의 서적을 관장하고 임금의 명령서인 교지(敎旨)를 작성하던 관청입니다. 관리들의 잘못을 감찰하던 사헌부, 임금에게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간하던 사간원과 함께 삼사(三司)라고 불리던 홍문관은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관청이었습니다. 엘리트를 골라 뽑는 관청이므로 이곳 출신 중에 정승이 된 사람도 많았지요. 아예 정승으로 가는 필수 과정으로 여겨지기도 하여 입신양명을 꿈꾸는 선비들이 선망했던 관청입니다.
옥당과 약방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습니다. 정조는, 옥당 관원들이 약방의 예절을 본받게 하기 위해 두 관청을 나란히 배치했다고 했습니다. 약방은 임금의 건강을 점검하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정성껏 문안을 올렸을 것입니다. 그 정성을 옥당 관원들에게도 요구했던 것입니다.
황인희 | 역사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