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은 한양 동쪽에 아홉 기의 능이 모여 있는 능역입니다. 그곳에 가면 제1대 태조부터 제24대 헌종까지 조선 왕조의 융성함과 쇠퇴함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시대에 따라 왕릉의 양식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아홉 기의 왕릉 중에는 지난 호에 소개한 건원릉 말고도 특이한 사연이 있는 능이 몇 기 더 있습니다.
▶ 동구릉의 현릉에는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가 잠들어 있다. 현릉에 가면 같은 능의 이름 아래 왕과 왕비의 능침을 각각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들어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윤상구
동구릉의 현릉에는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가 잠들어 있습니다. 현릉에 가면 같은 능의 이름 아래 왕과 왕비의 능침을 각각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들어놓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능을 동원이강릉이라고 합니다. 같은 울타리 안에 있지만 능침은 다른 언덕[異岡]에 각각 조성한 능이지요. 동원이강릉은 제7대 세조의 능에서 처음으로 쓰인 양식입니다. 그런데 세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이 어떻게 동원이강릉이 될 수 있었을까요?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은 직후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두 사람을 합장하여 현릉을 만들었지요. 그러나 맏아들 의경세자가 현덕왕후의 저주에 의해 요절했다고 믿은 세조는 현릉을 파헤쳐 현덕왕후의 시신은 시흥 군자 바닷가에 버렸답니다. 현덕왕후는 50여 년이 지난 중종 때 비로소 복위되었고 후대의 양식인 동원이강릉으로 현릉 동쪽에 묻히게 된 것입니다.
▶ 제24대 임금 헌종과 그 부인들의 능인 경릉은 조선왕릉 중 유일한 삼연릉이다.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침이다. ⓒ윤상구
제24대 헌종과 그 부인들의 능인 동구릉의 경릉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한 삼연릉입니다. 정자각에서 바라보기에 왼쪽부터 헌종, 원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침입니다. 순조의 손자였던 헌종은 4세 때 아버지 효명세자를 여의고 8세에 순조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미성년이었으므로 헌종은 대왕대비인 순조비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받게 되었지요. 순원왕후가 안동 김씨인 탓에 그 집안의 세도정치는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처음 이 경릉에 들어온 사람은 효현왕후입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왕비 곁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라는 유언이 없으면 왕을 왕비 곁에 장사지내지 않는 것이 조선 왕릉 조성의 원칙입니다. 그래서 헌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안동 김씨 관리들은 새로운 명당을 찾으러 다녔지요. 그러고는 열세 군데나 다녔지만 결국 이곳이 최고의 명당이라고 추천했습니다. 전국의 명당은 이미 자신들이 다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땅이 왕릉으로 수용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런데 경릉의 자리는 예전에 왕릉을 만들었다가 파묘한 흉당이었습니다.
왕의 능침을 조성한 자리도 문제입니다. 효현왕후가 이곳에 묻혔을 때 중앙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럼 왕릉을 만들 때 능침을 열어 합장을 하든가 아니면 중앙에서 좌우로 나눠 다시 자리를 잡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냥 왕을 왕비 곁 치우친 자리에 묻어버렸습니다. 헌종에게는 능호도 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국장 기간에 영부사 조인영의 상소에 의해 효현왕후의 능호인 경릉을 그대로 쓰기로 한 것이지요. 또 왕릉은 왕기를 받기 위해 열 자 깊이로 파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 헌종은 다섯 자(약 1.5m) 깊이에 묻혔습니다. 마지막으로 경릉에 들어간 효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1904년은 조선이 혼란에 빠져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니 따로 명당을 골라 대비의 능을 조성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경릉의 세 능침 사이에는 난간석을 터서 서로 통하게 했습니다. 난간석을 튼 것은 이 능침의 주인들이 부부지간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니 경릉의 삼연릉은 한 지아비가 한 방에서 두 아내를 거느리고 있는 형국입니다.
경릉의 석물들에는 6·25전쟁의 흔적인 총탄 자국이 무수히 많습니다. 능침 앞 무석인의 갑옷은 옷자락이 너덜너덜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총탄 세례를 받았습니다. 6·25전쟁의 비극을 역사책 속에만 들어 있는 옛날이야기로 여겼는데 이곳의 총탄 자국을 보니 전쟁의 처절함과 절박함이 피부에 와 닿는 것 같습니다.
▶ 동구릉의 가장 안쪽에 자리한 숭릉은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이다. ⓒ윤상구
동구릉의 가장 안쪽에 있는 숭릉은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입니다. 다른 능의 정자각은 우리 고유의 지붕 양식인 맞배지붕인데 숭릉의 정자각에는 팔작지붕을 얹었고, 보통 정면은 세 칸인데 거기에 양쪽 날개 같은 익랑이 더 붙어 규모도 커졌습니다. 한눈에 봐도 건물이 화려하고 웅장해 보이지만 팔작지붕과 익랑은 중국 양식입니다. 여기서 중국은 청나라가 아니라 명나라를 말합니다. 병자호란을 치른 후인 당시에는 오랑캐 청나라에 대한 반발로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 풍에 더욱 심취했던 것이지요.
명나라가 망한 후에도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나라가 다시 일어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지고 명의 재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조선은 한나라-송나라-명나라로 전승되는 중화의 흐름이 조선으로 이어진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조선을 ‘소중화’라 부르며 명나라 문화를 그대로 따르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던 것입니다.
현릉과 경릉, 숭릉 모두 겉모습은 독특하고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이런 씁쓸한 사연이 있었던 거지요. 실물을 보며 역사적 사실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 이것이 역사 유적 답사의 매력입니다.
황인희 | 역사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