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릉 다음으로 많은 능이 모여 있는 곳은 서오릉입니다. 서오릉은 숙종의 가족 묘역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숙종은 말할 것도 없고 장희빈을 포함한 숙종의 왕비 네 명의 능묘가 모두 서오릉에 있기 때문입니다.
▶ 서오릉의 명릉은 조선 제19대 왕 숙종과 그의 제1계비 인현황후, 제2계비 인원왕후의 능이다. ⓒ윤상구
서오릉의 명릉은 조선 제19대 숙종과 그의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의 능입니다. 조선 역사상 흔치 않은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숙종은 단종을 복위시키는 등 과거사 정리를 가장 많이 한 왕이기도 합니다. 그 덕에 숙종 때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계속되던 사회 혼란을 어느 정도 가라앉힐 수 있었지요. 숙종은 아홉 명의 아내에게서 여덟 명의 자녀를 얻었고 그중 두 명(경종, 영조)은 왕이 되었습니다. 46년간 재위했던 숙종을 비롯해 이들 삼부자가 통치한 기간은 통틀어 102년입니다. 조선 왕조 519년 중 1/5의 기간을 이들 부자가 통치한 셈입니다.
▶ 대빈묘는 서오릉 안에 있는 장희빈의 묘다. 한때 중전 자리에도 올랐고 아들이 왕이었는데도 묘가 초라하다. ⓒ윤상구
숙종과 나란히 묻혀 있는 사람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현왕후입니다. 장희빈의 모함을 받아 대궐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와 왕비로 7년을 더 살았지만 자식을 얻지 못한 채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현왕후와 숙종의 능이 쌍릉으로 조성돼 있는 언덕 왼쪽에 또 다른 능침이 하나 더 있습니다. 숙종의 제2계비인 인원왕후의 능입니다. 인원왕후는 연잉군이던 힘없는 왕자를 제21대 임금 영조로 만들어준 장본인이지요. 연잉군 생모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소론은 경종에게 양자를 들여 세자로 책봉하려 했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대비 인원왕후는 “선왕(숙종)의 혈통이 있어 삼종(효종, 현종, 숙종)의 혈맥이 끊이지 않을 터인데 누가 망령된 짓으로 선왕의 혈통을 막으려 한단 말인가?” 하며 대신들을 엄히 꾸짖었습니다. 덕분에 연잉군은 세제로 책봉됐고 왕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명릉은 우리가 보기에 왼쪽부터 인원왕후, 숙종, 인현왕후의 순으로 능침이 조성되어 얼핏 보면 동원이강릉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예법대로라면 왼쪽부터 숙종, 인현왕후, 인원왕후의 순으로 능이 조성됐어야 옳지요.
원래 인원왕후의 능은 별도로 만들어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원왕후는 며느리인 영조비 정성왕후와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원왕후가 별세했을 때 정성왕후의 능인 홍릉의 산역 공사가 이미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한꺼번에 대 역사를 두 군데서 벌이기에는 국고 손실이 엄청났지요. 그래서 대비였던 인원왕후는 왕비 정성왕후에게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됐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인원왕후의 능은 명릉 가까이 조성된 별도의 능입니다. 그러나 앞의 이유로 정자각도, 참도도, 능호조차도 별도로 갖지 못하고 아직까지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 홍릉은 정성왕후의 능침이 있는 곳이다. 특이한 것은 능침이 중심에 있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쳐 왼쪽이 빈 공간으로 남아 있다는 점. 영조는 정성왕후가 별세하자 그 옆에 자신의 묏자리를 마련해두라고 했지만 결국 그 자리에 묻히지 못했다. ⓒ윤상구
그렇다면 대비의 장례를 대충 치르면서까지 공들여 조성한 정성왕후의 홍릉은 어떤 모습일까요? 홍릉 역시 서오릉에 있습니다. 홍릉에 가보면 특이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능침이 곡장 안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쏠려 있어, 우리가 볼 때 왼쪽이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영조는 정성왕후가 별세하자 그 옆에 자신의 묏자리를 미리 만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영조는 그 자리에 묻히지 못했습니다. 영조의 장사를 지낸 사람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였습니다.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조는 명당을 찾아보라고 명했습니다. 이에 황해도사 이현모가 “홍릉 위쪽의 비워놓은 자리는 곧 영조께서 유언하신 곳으로서 미리 처리해놓은 것인데, 어찌 이를 버리고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선왕의 유언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상소했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중요한 일은 진실로 마땅히 신중하게 살펴서 해야 하는 것”이라며 이현모를 삭탈관직 해버렸습니다. 결국 영조의 능은 동구릉 내 원릉으로 결정됐고, 홍릉의 한편은 썰렁하게 텅 빈 상태로 남게 됐습니다.
그런데 선왕이 미리 마련해놓은 자리를 버리고 굳이 더 좋은 자리라고 새로 고른 원릉 터는 그로부터 103년 전에 효종이 묻혔다가 천장한 파묘 자리였습니다. 한 번 파헤쳐졌던 곳이라 왕릉 터를 잡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기와 혈이 이미 날아간 흉당입니다. 이는 아버지를 죽인 할아버지에 대한 일종의 복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천 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다는 명당(융릉)으로 천장했지요. 조상의 묏자리가 후손들의 길흉화복을 결정한다고 믿었던 당시의 사고방식으로는 자신의 명운과 국운을 건 큰 모험이었던 것입니다.
서오릉 안에는 장희빈의 대빈묘도 있습니다. 장희빈은 한때 중전의 자리에도 올랐고 아들이 왕이었는데도 그녀의 묘는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은 아무리 병약한 왕이었다지만 4년 넘게 왕위에 있었으면서 어머니 묘를 최소한 ‘원’으로나마 승격시킬 수는 없었을까 하는 의아한 마음이 듭니다.
숙종은 왕릉을 간소하게 할 것을 명했습니다. 그래서 명릉은 능침도 작고 문석인과 무석인, 마석 등 모든 석물이 이전의 다른 능에 비해 아주 작습니다. 이렇게 작은 왕릉의 규모는 흥선대원군이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철종의 능을 크게 만들기 이전까지 왕릉 조성의 원칙으로 이어졌습니다.
황인희 | 역사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