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는 역대 임금의 영혼을 모셔둔 곳입니다. 그들의 영혼이 나라를 지킨다고 생각해 종묘는 아주 중요한 곳으로 여겼습니다. 조선시대에 임금이나 왕비, 대비가 세상을 떠나면 일단 재궁이라 부르던 관에 시신을 안치하고 궁궐 안 큰 건물 하나를 빈전(殯殿)으로 정해 그곳에 모셨습니다. 지금의 빈소인 셈이지요. 빈전에서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내다가 5개월이 지난 후에야 산릉으로 옮겨 매장합니다. 그런 후에 궁궐 안 조금 작은 건물을 혼전(魂殿)으로 만들고 그곳에 신주를 모셔두고 3년 동안 제사를 지냅니다. 3년이 지나면 그제야 3년 상(喪)이 끝나는 것이지요. 그때 신주를 종묘에 모시고 태조니 태종이니 하는 묘호도 올립니다. 왕비가 남편인 왕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경우에는 왕이 세상을 떠나 3년 상이 끝날 때까지 혼전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종묘에는 왕을 중심으로 모셨으니까요.
왕실에서는 세 가지 큰 제사를 지냅니다. 종묘와 산릉, 선원전 제사입니다. 종묘 제례는 망자의 영혼에 대해, 산릉 제례는 망자의 육신에 대해, 선원전 제례는 망자의 인격에 대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선원전은 궁궐 안에 있는데 역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 어필, 어책 등 기념품을 보관하는 곳입니다.
조선의 임금과 왕비들이 묻힌 조선 왕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조선 왕릉은 모두 42기인데 그중 북한 개성에 있는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의 제릉(齊陵)과 정종과 그 부인 정안왕후의 능인 후릉(厚陵)을 제외하고 남한에 있는 40기만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왕릉의 조건 중 풍수지리상 명당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왕이 있는 도성에서 약 40킬로미터 안에 있어야 한다는 점도 있습니다. 후손인 왕들이 능에 참배해야 하는데 그 행차가 복잡해 너무 멀리는 갈 수 없었고 무슨 변고라도 생기면 빨리 돌아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일 왕복 가능한 거리에 능 만드는 것을 원칙으로 했는데 물론 예외의 경우도 몇 기 있지요.
조선 왕릉은 얼핏 보기에 다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이 다르고 왕이나 왕비의 살아 있을 때 또는 세상을 떠났을 때의 상황에 따라, 권력의 정도에 따라, 능의 지형에 따라, 당시 나라 형편에 따라 다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왕릉의 기본적인 모습 중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홍살문과 참도, 정자각과 능침입니다. 왕릉 입구에는 커다란 홍살문이 있는데 이는 신성한 안쪽을 그렇지 못한 바깥쪽과 구분하기 위해 세워놓은 것입니다. 홍살문을 지나면 참배하는 길, 즉 참도(參道)가 펼쳐집니다. 참도는 왕이 다니는 ‘어도(御道)’와 왕릉의 주인인 혼령이 다니는 ‘신도(神道)’로 이뤄져 있습니다. 왼쪽의 높은 길은 신도이고, 오른쪽의 낮은 길은 어도입니다. 왕릉의 참도는 표면을 일부러 울퉁불퉁하게 해놓았다고 합니다. 넘어지지 않고 걸으려면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게 되고 그러면 누구나 능침에 대한 예를 갖추게 되기 때문이지요. 참도가 끝나는 곳에 서 있는 건물은 제향(제사)을 지내는 정자각(丁字閣)입니다. ‘고무래 정(丁)’ 자 모양으로 생긴 건물이라는 뜻입니다. 정자각 뒤편으로 높은 언덕이 있는데 이를 ‘강(岡)’이라고 합니다. 조선 왕릉만의 특징인 강은 땅속에 흐르는 생기의 저장 탱크입니다. 또 일반 무덤과 달리 높은 강을 권좌 삼아 왕의 위엄을 보여주는 과시 장치이기도 합니다.
▶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다. 건원릉은 봉분에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덮은 특이한 왕릉이다. ⓒ윤상구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습니다. 태조는 후계자 지정을 잘못한 탓으로 왕자의 난을 겪어야 했고 마음 편치 못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태상왕으로 물러앉은 태조는 1408년 창덕궁 별궁에서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에 자신의 묏자리를 마련해두었습니다. 그러나 신덕왕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태종은 태조가 살아 있을 때부터 정릉을 훼손하기 시작했습니다. 태조는 이 꼴을 보고 자신은 차라리 멀리 고향 함흥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지요.
▶ 정릉.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에 자신의 묏자리를 마련해두었다. ⓒ윤상구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신덕왕후의 능을 아예 도성 밖 현재 자리로 이장해버렸습니다. 봉분을 깎고 묘로 강등해서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킨 것이지요. 정릉에 있던 병풍석 등 석물은 청계천 다리를 고치는 데, 목재는 중국 사신을 맞는 태평관을 짓는 데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태조의 능은 지금의 건원릉 자리에 조성했습니다. 고향 함흥에 묻어달라는 태조의 마지막 유언조차 들어줄 수가 없었지요. 도읍은 한양인데 태조의 능을 함흥에 만들면 조선의 정통성이 흔들릴 위험이 있었고 자신이 일으킨 골육상쟁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건원릉의 가장 특이한 점은 봉분에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덮었다는 것입니다. 고향에 묻히고 싶다는 태조의 유언은 그대로 다 들어줄 수 없었지만 조금이나마 수용하기 위해 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건원릉 봉분에는 언뜻 보면 한동안 돌보지 않아 잡초가 무성한 것으로 여겨질 만큼 억새풀이 무성합니다. 이는 함흥의 억새가 죽을까 봐 일 년에 한 번, 한식에만 벌초를 하기 때문입니다.
황인희 | 역사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