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이름 달고 자생식물 보전 메카로 거듭

2022.08.07 최신호 보기

▶멸종위기종인 독미나리 보전원. 2011년 화재로 없어진 대형 온실이 있던 자리다.

국립으로 재탄생한 한국자생식물원
‘한국자생식물원이 국립으로 새롭게 시작합니다.’
7월 6일 강원 평창군에 있는 한국자생식물원에 도착하자 커다란 현수막이 건물에 걸려 있었다. 이틀 전인 7월 4일 산림청은 국립한국자생식물원 개원 행사를 열었다. 2021년 7월 7일 김창열 전 원장이 한국자생식물원을 정부에 기부한 뒤 1년 동안 시범 운영을 거쳐 국립한국자생식물원으로 정식 개원한 것이다.
한국자생식물원은 김창열 전 원장이 외래종과 원예종이 범람하는 가운데 우리나라 고유 식물유전자원의 보물 창고를 만들겠다는 각오로 1989년부터 조성해 1999년 문을 연 곳이다. 우리나라 자생식물을 특화해 조성·운영하는 최초의 자생식물원이자 2002년 산림청 등록 1호 사립수목원이다. 약 10만㎡의 토지에 209만 그루의 자생식물과 전시관 등 5채의 건물이 있어 약 202억 원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감정평가됐다.

▶국립한국자생식물원에 입장하면 전망 좋은 북카페가 먼저 나타난다. 

산분꽃 등 멸종위기종 증식 시도
한국자생식물원은 한국특산식물보전원, 멸종위기식물보전원, 희귀자생식물보전원 등 10곳의 전시원에 자생식물 1432종을 보유하고 있다. 자생식물에는 희귀식물 316종과 특산식물 155종이 포함돼 있다.
20년 넘게 한국자생식물원에서 일하고 있는 김민하 주임은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식물은 4000~5000종 정도인데 외국에는 없는 종이 한국특산식물”이라며 “멸종위기식물은 우리나라에서 없어지는 식물을 정부에서 정해놓은 것이고 희귀식물은 멸종위기로 가기 전 단계”라고 설명했다.
해발 700m가 넘는 고지대인 평창군의 특성상 한반도 남쪽에서는 이곳에서만 자생하는 멸종위기식물이 몇 가지 있다. 대표적인 게 산분꽃나무다. 한국자생식물원에도 단 두 그루밖에 없다고 했다.
김 주임은 “여기가 거의 남방한계선인 데다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면서 산분꽃나무 상태가 그다지 좋지는 않다. 증식하려고 씨앗도 받아보고 삽목 같은 영양번식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지만 아직 증식이 원활하지 않다”며 “이번에 국립화가 됐으니 난을 대량 증식시킨 기술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상일 대리(왼쪽)와 김민하 주임이 멸종위기종 산분꽃나무(오른쪽 빨간 잎 나무)를 설명하고 있다.

기린초 변종 등 미확인 희귀식물도
반면 멸종위기종인 개병풍은 이곳에서 대규모 군락을 이루고 있다. 김 주임은 “다른 식물원은 냉방까지 해줘도 많이 안 큰다고 하던데 여기서는 노지에 그냥 키워도 잘 자란다”고 했다. 식물을 좀 아는 이들은 이곳 개병풍 군락을 보고 놀랄 정도라고 했다. 다른 데서는 잘 볼 수 없을 정도로 꽃과 잎이 크기 때문이다.
개병풍을 산에서 보기 힘들어진 이유 가운데 하나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잎이 큰데 나물로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싹 다 베어 가요. 맛이 있거나 꽃이 예쁜 식물은 보호하지 않으면 이렇게 없어지는 거죠.”
한국자생식물원의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개병풍 군락을 조성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김 주임은 “씨앗부터 시작해 이만하게 자라기까지 15년은 걸린 것 같다”며 “한국자생식물원의 자랑”이라고 말했다.
김창열 전 원장이 한곳에 모아둔 기린초의 여러 변종도 볼 수 있었다. 아기기린초, 섬기린초 등 언뜻 보면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지만 자세히 보면 줄기의 색깔이 빨간 것도 있고 노란 것도 있다. 학계에 보고하거나 이름을 정식 등록하지 않은 상태라 팻말조차 세워놓지 않았다.
김 주임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는 이유로 많이 연구되지 않은 식물 가운데 하나가 기린초”라고 했다. “이렇게 나타난 변이가 3세대나 4세대까지 넘어가야 새로운 종이 돼요. 유전자 검사까지 거쳐 새로운 종이 탄생하게 됩니다.”
김상일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대리는 “국립수목원 연구원들과 외부 전문가들이 6월에 이곳을 돌아봤는데 ‘굉장히 특이한 종을 많이 수집해뒀다’, ‘무슨 종인지 확인이 안 된 희귀식물도 많다’며 놀라더라”고 전했다.

▶한국자생식물원은 지역 농가에서 재배한 자생식물을 입장객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행사를 하고 있다. 

멧돼지 습격에 하늘나리 초토화
한국자생식물원 직원들이 자생식물을 관리하면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멧돼지다. 김 주임은 “멧돼지가 희귀식물들을 다 캐 먹고 잔디밭도 맨날 뒤집어놓아 희귀식물과 잔디밭을 복구하는 데 인력과 시간이 굉장히 많이 든다”고 했다.
가장 피해가 큰 식물이 솔나리와 하늘나리 등 나리 종류다. 김창열 전 원장이 공들여 조성해놓은 하늘나리 군락지는 멧돼지가 파헤치는 바람에 아예 사라졌다. 김 주임은 “지금은 바위 옆에 하나씩 심어놓는데도 그 냄새까지 멧돼지가 맡아 다음 날이면 없어지곤 한다”고 한탄했다. “멧돼지 때문에 솔나리와 하늘나리를 거의 보기 힘들어졌어요. 반면에 참나리는 되게 흔하잖아요. 그런데 멧돼지가 참나리는 안 먹습니다.”
한국자생식물원은 오대산국립공원 안에 있어 멧돼지를 죽일 수도 없다. 돈을 많이 들여 철조망과 전기 울타리까지 설치했지만 허사였다. “멧돼지가 ‘나프탈렌 냄새를 싫어한다’, ‘호랑이 똥 냄새 맡으면 안 온다’는 얘기에 그런 것까지 구해 시도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멧돼지가 굉장히 똑똑합니다. 철조망이 높으면 땅굴을 파고 낮으면 뛰어넘고 전기 울타리는 전원 부분만 몸으로 부딪쳐 망가뜨리고 들어와요.”
세계적으로 식물자원 확보를 위한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하고 그 중요성을 깊이 인식한 선진국들은 수목원을 조성해 식물자원을 수집하는 등 이를 자원화하는 데 적극적이다. 산림청은 수목유전자원의 보존과 자원화를 위해 기후·식생대별로 국립백두대간수목원(2015년), 국립세종수목원(2020년), 국립한국자생식물원(2021년), 국립새만금수목원(2026년) 등 국립수목원을 조성하고 있다.
7월 4일 개원식에서 남성현 산림청장은 “식물자원 보전·관리의 핵심적 역할을 하는 수목원을 국가적 차원에서 더욱 발전시켜 자생식물을 수집·증식·보존해 미래세대에 식물자원의 소중함을 인식시키고 탄소중립에도 기여하겠다”며 “앞으로 기후변화 위기에 수목원이 산림 생물의 다양성 증진과 지역 상생·협력으로 국민에게 행복을 줄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김민하 주임이 멸종위기종 개병풍 군락을 살펴보고 있다. 한국 자생식물원의 개병풍은 잎과 꽃이 큰 거로 유명하다. 

▶한국자생식물원은 희귀식물 316종과 특산식물 155종 등 자생식물 1432종을 보유하고 있다.

국립 전문 인력과 연계로 시너지
한국자생식물원은 2027년까지 연구동 신축, 시설 현대화, 전시원 확장, 편의시설 개선 등으로 식물원 운영을 안정화하고 더욱 편안한 관람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현재 내부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부지에 세워질 연구동은 카페테리아와 테라스를 갖춰 관람객이 식물원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김상일 대리는 “2022년 기본 실시 설계를 거쳐 2023년 안에 연구동을 완공하는 게 목표”라며 “장기적으로는 사계절 관람과 교육이 가능한 온실과 대규모 야생화 군락지를 조성할 계획도 갖고 있다”고 했다.
국유재산으로 귀속된 한국자생식물원은 산림청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이 위탁운영한다.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은 국립백두대간수목원과 국립세종수목원도 운영하고 있다.
김 주임은 “국립식물원만 전담하는 전문 기관인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에는 전시 수목원 분야에서 오래 일한 전문 인력이 많다”며 “나무 전정부터 시작해 여기 있어선 안 되는 나무는 저리로 옮기고 정리는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장기적 방향까지 조언받고 있다”고 말했다.

▶7월 6일 강원 평창군 한국자생식물원에 ‘한국자생식물원이 국립으로 새롭게 시작합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2021년 7월 7일 김창열 전 원장(오른쪽)이 한국자생식물원 기부 협약서를 산림청에 전달했다. 이날 그는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 나의 역할은 여기까지”라며 “이제 신뢰할 수 있는 기관에서 우리 고유 식물을 영원히 빛나도록 맡아주시라”고 말했다.

인근 지역 농가와 상생 축제 계획
한국자생식물원은 2011년 발생한 온실 화재로 7년 넘게 휴관하기 전만 하더라도 매해 10만 명 이상 방문하는 유명 관광지였다. 한국관광공사가 ‘한국의 가볼 만한 곳’에 선정했고 인근 월정사 전나무숲길과 함께 방문하면 좋은 명소로 꼽혔다.
김 주임은 “10년 전에는 월정사를 방문하는 연간 100만 명 가운데 10분의 1이 이곳을 다녀갈 정도였다”며 “재개관한 뒤 코로나19 대유행이 닥쳐 주춤했는데 이제 국립식물원이 됐으니 앞으로 많이 나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한국자생식물원은 지역 농가 9곳에서 재배한 자생식물을 입장객에게 나눠주는 행사를 하고 있다. 3000~5000원 입장료를 낸 유료 입장객뿐 아니라 입장료가 없는 만 6세 이하 어린이와 만 65세 이상 어르신에게도 판매가 2000원의 자생식물을 무료로 증정한다.
지역 농가와 연계한 상생 축제도 준비하고 있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과 국립세종수목원은 지역 농가에 위탁 재배한 자생식물로 ‘봉자 페스티벌’ 등 꽃 축제를 2019년부터 열고 있다. 자생식물의 보호와 보전을 꾀하고 지역 소득 증대, 일자리 창출 등 지역 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다.
김 대리는 “한국자생식물원도 주변에 있는 지역 농가에 자생식물 재배를 맡겨 경제적 소득을 보장해주는 상생 축제를 빠르면 2023년부터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글·사진 원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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