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식량 위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한껏 고조된 식량 위기가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역대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던 세계 식량 가격이 두 달 연속 소폭 하락한 것이다.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가 최근 발표한 5월 세계식량가격지수는 157.4로 4월보다 0.6% 하락했다. FAO는 24개 품목의 국제가격 동향을 조사해 5개 품목군(곡물·유지류·육류·유제품·설탕)별로 식량가격지수를 매달 발표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인 3월 이 지수는 1996년 집계를 시작한 이래 최고치인 159.7을 기록했다가 4월 158.5로 소폭 하락한 데 이어 5월에도 내렸다.
하지만 곡물과 육류 가격은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어 불안감은 여전하다. 곡물 지수는 4월보다 2.2% 상승했다. 밀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주요국의 작황 부진에 더해 인도의 수출제한 조치 여파로 가격 상승세를 유지했다. 육류 지수도 0.5% 상승했다. 우크라이나의 공급망 장애, 유럽과 중동지역의 수요 증가 등으로 가격이 올랐다.
식량 위기 부추기는 곡물 수출 봉쇄
이번 전쟁이 식량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 이유는 우크라이나가 세계적인 곡창지대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흑색토는 비옥하기로 유명하다. 우크라이나는 경작지 비중이 57%(2019년 기준)로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다. 세계 최대 농업국가인 미국도 경작지 비중은 17%에 불과하다. 우크라이나는 전 세계 밀 수출량의 8%, 옥수수는 13%, 해바라기유는 30%를 차지한다.
러시아 군대는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농토를 초토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식량 수출길도 파괴했다.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 봉쇄는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전쟁 전에 수확해둔 곡물을 수출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러시아 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적들에게 식량이 수출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엄포를 놓기도 했다. 러시아의 곡물 수출 봉쇄는 아프리카와 중동 등 저소득 국가들의 식량난을 부추기는 ‘범죄행위’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를 의식한 탓인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최근 우크라이나 곡물을 운반하는 선박의 운항을 막지 않고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항구를 이용한 수출을 보장하겠다고 밝혔다. 식량 위기에 대한 비난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이를 모면하려는 의도로 보이지만 일단 숨통을 틔우게 됐다.
푸틴은 “곡물 수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크라이나가 관리하는 항구를 거치거나 베르단스크와 마리우폴을 통하거나 다뉴브강과 루마니아, 헝가리, 폴란드를 거쳐 가능하다”고 말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는 세계경제를 흔들고 있다. 국제무역은 상품과 원자재의 자유로운 공급이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이 기대를 무너뜨리고 국제 식량과 원자재, 에너지 시장을 교란하고 있다.
국내 곡물 소비량 70% 이상 수입 의존
위기는 식량 해외 의존도가 높은 나라에 먼저 찾아올 것으로 보인다. 세계은행은 식량 가격이 1%포인트 오를 때마다 1000만 명이 빈곤에 빠진다고 경고한다. 세계은행은 “각국 정부는 경제성장을 위해 모든 기회를 활용하고 세계경제에 해가 될 수 있는 조처는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회예산정책처가 2021년 10월 ‘곡물 수급안정사업 정책분석’ 보고서를 통해 발표한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곡물을 일곱 번째로 많이 수입한다. 2019년 기준 우리나라 곡물 전체 수요량 2104만 톤 가운데 1558만 톤을 수입에 의존한다. 우리나라 곡물 소비량의 70% 이상을 외국에서 사들이고 있는 것이다.
2007~2008년 애그플레이션(곡물가격 상승으로 일반 물가도 오르는 현상) 당시 정부는 식량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해외 농장 매입(해외 직농)과 국가곡물조달시스템 구축을 추진했다. 하지만 성과가 신통치 않은 데다 국제 곡물 시장이 안정되면서 얼마 안 가 흐지부지됐다.
아직은 애그플레이션 때에 견줘 가격과 수급이 안정적이다. 세계 식량 재고율이 소비량 대비 30% 수준인데 이 정도면 과거 사례를 봤을 때 심각한 상황은 아니다.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준비하면 된다.
무엇보다 식량 위기에 맞닥뜨리게 되면 정치·외교적 대응이 필수다. 식량 외교에 적극 나서는 등 위기에 선제 대응할 범정부 지휘본부(컨트롤타워)가 필요한 이유다. 이에 따라 정부는 업계 및 전문가로 구성된 국제곡물수급대책위원회를 만들고 대체 원산지 확보 등의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이춘재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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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