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천, ‘정치가 기성세대를 위한 도구들’, 종이에 레이저, 76×56cm(각), 2012
사람들이 카페에 가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곳이 집 못지않게 친숙하면서 동시에 뭔가 특별한 분위기를 지닌 공간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가장 중요한 밥 먹는 일도 마찬가지. 요즘 같은 세상, 집밥으로 하루 세 끼를 해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집과 식당의 경계가 흐려졌다. 이처럼 집 밖에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일은 이제 평범한 일상이 됐다.
반면, 미술관을 찾는 일은 여전히 뭔가 특별한 일로 여겨진다. 물론 예전에 비해 문턱이 낮아진 것도 사실이다. 국공립·사립 미술관뿐만 아니라 작은 규모로 개인이 운영하는 갤러리도 곳곳에 많이 생겨났다. 사람들이 동네 카페나 단골 식당을 찾듯 전시장을 부담 없이 드나들면 좋겠다.
덧붙이자면, 유명한 미술관은 명성에 걸맞게 이름난 건축가가 설계한 경우가 많다. 좋은 예가 리움미술관이다. 리움미술관의 독립된 건축물 세 개는 그 자체가 작품이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건축가 세 명이 각각 설계를 맡았다. 마리오 보타(뮤지엄 1), 장 누벨(뮤지엄 2), 렘 콜하스(기획전시실)가 그들이다. 이 중에서도 렘 콜하스가 가장 유명하다. 서울대학교미술관도 렘 콜하스가 설계했다.
▶윤동천, ‘각종 중독을 피하기 위한 소일거리들’, 종이에 각종 재료, 28×22cm(각), 2014
일상 속에서 미술을 실천하는 작가
얼마 전, 서울대학교미술관에서 윤동천 교수 개인전이 열렸다. 2022년 8월 서울대 미술대학 서양화과 정년퇴임을 앞두고 열린 회고전 성격이었다. 전시 주제는 ‘산만(散漫)의 궤적’.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시대, 예술가에게 요구된 소명에 그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그 흔적을 보여준다는 의미다.
개인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스타일이 다양하다. 전통적인 유화 페인팅이나 판화는 물론이고 사진, 조각, 오브제, 설치, 영상에 이르기까지 장르 구분 없이 형식이 다채롭다. 그렇지만 작품에 담긴 내용은 한결같다. ‘지금, 여기, 우리의 현실’에 대처하는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 ‘예술과 현실의 합치’를 소망하는 작가의 태도가 담겨 있다.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 현대미술은 탈이념-다원화의 시대로 전환됐다. 이 지점에서 윤동천의 존재감은 두드러진다. 1980년대 우리 미술계는 모더니즘과 민중미술로 극명히 나뉘어 대립했다. 따라서 당시 젊은 작가들 앞엔 오직 두 개의 선택지만 놓여 있는 형국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그는 ‘내용(민중미술)’과 ‘형식(모더니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거나 기울지 않았다. 민중미술적 내용을 모더니즘 형식으로 구현했다고나 할까. 이런 입장은 지금도 변함없다. 윤동천의 작품 주제는 ‘나(개인)’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예술(가)에 관한 문제로까지 확장된다.
후진적 정치 풍토와 모순 가득한 사회현실을 작품으로 비판한다. 이때 은유와 상징의 단계를 넘어 풍자와 유머의 영역으로까지 승화된다. 윤동천의 작품은 특히 제목을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제목을 통해 작품 이미지에 담긴 속뜻을 헤아릴 수 있다. 수수께끼 해독을 위한 단서를 거기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 몇 점을 간략히 소개한다.
▶윤동천, ‘강조어법 1, 2, 3(집중, 확대, 반복-나열)’, 디지털 프린트, 76×56cm(각), 2005
모순 가득한 사회현실 작품으로 비판
반듯하고 깨끗한 종이 위에 각종 도구의 실루엣이 레이저로 새겨져 있다. 주걱, 대나무 자, 빨랫방망이, 홍두깨, 망치, 야구 방망이, 다듬잇방망이다. 그 모양새는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감각적이다. 여기에 매끈하게 잘 다듬은 곡괭이 자루가 전시장 벽에 기대어 놓여 있다. 이것 역시 웬만한 추상조각 못지않게 날렵하고 매력적인 형태다. 이 작품 제목은 ‘정치가 기성세대를 위한 도구들’. 처음 발표했을 때 제목에서 ‘정치가’를 지우고 그 자리에 ‘기성세대’라는 단어를 새로 써넣었다. 작가는 이 도구들이 원래 사용 목적과 다른 용도(폭력의 도구)로 쓰일 수 있음을 암시해 보여준다.
A4 용지 크기 액자 30개가 5×6 병렬로 가지런히 걸려 있다. 액자 속 종이에는 각기 다른 문양과 패턴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하나하나가 독립된 기하학적인 추상회화 작품으로 손색없다. 그만큼 완성도 높은 그림이다. 그런데 제목은 ‘각종 중독을 피하기 위한 소일거리들’이다. 미술이라는 난해하고 높은 장벽을 무너뜨리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전문 화가가 아닌 일반인도 (각종 중독을 피하기 위해) 충분히 할 수 있는 건전한(?) 소일거리임에 틀림없다.
‘강조어법 1, 2, 3(집중, 확대, 반복-나열)’이란 작품은 제목처럼 기초적인 조형 원리 연습을 연상시킨다. 미술 전공자라면 한 번쯤 활용했을 방법이다. 이미지를 강조해 보여주고자 할 때 응용한다. ‘집중’, ‘확대’, ‘반복-나열’의 예를 보여주는 오브제는 알약이다. 미국 제약회사 화이자사에서 만든 발기부전치료제다. 이 알약의 효능과 용도는 끝을 모르는 인간의 욕망과 한치도 다르지 않다. 작품 제목을 되새기며 이 알약을 물끄러미 다시 바라본다. 새삼 그 모양새와 색깔이 순수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자본주의사회 이전, 지금보다는 비교적 ‘착했을’ 인간의 욕망이 중첩(오버랩)된다.
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