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 미술관 전경. 왼쪽에 보이는 타원형 건물이 1999년에 새로 지은 부속 전시관이다.│Silva.1994
네덜란드는 국토의 4분의 1이 해수면보다 낮은 입헌군주제 나라로 의회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유럽 북서부의 강소국이다. 미술사에서 네덜란드가 남긴 업적은 찬란하다. 17세기 유럽 미술계의 독보적인 존재였던 ‘빛의 화가’ 렘브란트(1606~1669), 오늘날 전 세계인들이 가장 열광하는 화가로 스토리텔링의 화신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점과 선, 면만으로도 훌륭한 그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기하학적 추상화의 창시자 피터 몬드리안(1872~1944). 세 명 모두 서양미술사를 길이 빛낸 네덜란드의 국보급 화가들이다.
이들 중에서도 고흐는 미술 문외한들에게도 친숙한 전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미술계의 독보적인 전설이다. 20대 중반 넘어 독학으로 화가의 길을 택한 점, 권총으로 37세의 짧은 삶을 마감한 점, 심장 아래 총알이 관통했으나 이틀이 지나 숨이 멎은 점, 분신과도 같았던 친동생과 불가사의한 형제애, 살아생전 팔린 그림이라고는 단 한 점뿐이었던 점, 친동생과 주고받은 700통 가까운 육필 편지가 고스란히 보존돼 서간집으로 발간된 점, 사후 초일류 화가로 재평가돼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천문학적으로 치솟은 그림의 경제적 가치, 10년이라는 짧은 화가 생애에서 사나흘마다 1점씩 그림을 그린 점, 스스로 귀를 자른 뒤 정신 병원에 입원한 점 등 삶의 모든 것이 스토리텔링에 최적화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파리 외곽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있는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의 묘지│Wayne77
▶가운데가 위로 뻥 뚫린 반 고흐 미술관 내부│Hajotthu
반 고흐 미술관 탄생의 3대 공신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에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있다. 국립 반 고흐 미술관. 고흐 그림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유한 미술관이자 소묘, 판화, 화첩, 친필 편지, 기록물 등 고흐의 삶의 행적과 작품 세계 전반을 조망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충만한 이상적인 공간이다. 화가 본인은 물론 친동생 테오(1857~1891), 테오의 아내 요한나 반 고흐 봉어(1862~1925), 테오의 외동아들인 조카 빈센트 빌렘 반 고흐(1890~1978), 이들 중 단 한 명만 없었더라도 반 고흐 미술관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흐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린 세월은 10년이 채 안 된다. 길지 않은 그림 인생에서 유화만 879점을 남겼다. 죽기 직전까지 3~4일에 한 점씩 그림을 완성했으니 창작에 대한 집념과 예술로 자신을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승부사 기질을 엿보고도 남는다.
특히 고흐 화풍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아를(1888년 2월~1889년 5월) 시절과 특유의 붓 터치 기법을 완성한 생 레미(1889년 5월~1890년 5월) 시절에 이어 생을 마감한 오베르(1890년 5월~1890년 7월 29일)에서 절정의 예술적 업적을 일궈냈다. 다작이면서 수작을 많이 남긴 고흐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모두 이 시기에 탄생했기 때문이다. 아를, 생 레미, 오베르에서 그린 고흐의 주요 작품들은 거의 다 반 고흐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고흐에게 피붙이 동생 테오의 존재는 각별했다. 화가의 삶을 가능케 했던 경제적 후원자이자 인생의 동반자 겸 예술적 동지로 평생 곁을 떠나지 않았고 고흐의 죽음에 따른 충격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정신질환을 앓다 6개월 후 형을 따라 하늘나라로 떠났다. 형제는 죽어서도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공동묘지에 나란히 묻혀 이승에서의 우애를 저승에서도 이어가고 있으니 인연도 이런 인연이 없다.
고흐는 생전에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테오는 나를 그림의 세계로 이끈 정신적 지주이자 자극이며 관객이자 스승이었다”라고 여러 차례 고백한 바 있다. 테오를 자신의 전부로 여긴 고흐만큼이나 형을 향한 테오의 헌신적인 사랑도 눈물겨웠다.
▶(왼쪽부터) 테오 반 고흐│Ernest Ladrey c. 1888, 요한나 반 고흐 봉허│Woodbury & Page, 1889, 고흐의 조카 빈센트 빌렘│Ron
Kroon / Anefo│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무명의 화가에서 일약 세계적 스타로
비주류 화상(?商)이라 얼마 되지도 않는 수입을 쪼개고 쪼개 형이 죽을 때까지 생활비와 물감값을 빠뜨리지 않고 뒷바라지한 정성은 경이로움으로 다가온다.
특히 형과 주고받은 600통이 훨씬 넘는 편지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보관해 아내에게 물려줌으로써 훗날 고흐 서간집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터전을 닦은 인물도 테오다. 미술사가들이 테오의 수집가 기질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사료적 가치 때문이다.
고흐의 편지에는 고흐의 인생관과 심리상태, 생활상 등 인간적인 면모와 함께 예술철학, 작업 진행 과정, 화가로서 꿈 등 작업 세계 전체를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어 고흐의 일대기나 다름없다.
테오가 고흐 생전의 은인이었다면 테오의 아내 요한나 봉어는 고흐 사후의 은인이다. 보잘것없는 무명의 괴팍한 화가에 불과했던 고흐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린 주인공이 바로 요한나 봉어다.
고흐가 죽고 마음의 병을 앓던 테오도 결국 6개월 후 형의 곁으로 갔다. 고흐의 유작과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 사진 등 숱한 기록물은 모두 요한나 봉어에게 상속됐다. 영어 교사 출신인 요한나 봉어는 영리했다. 예술적 안목도 뛰어났다. 브랜드 마케팅 감각도 남달랐다. 그는 고흐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알아보고 대규모 회고전을 성사시키는가 하면 유명 화상과 평론가들을 쫓아다니며 고흐와 고흐 그림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화가 고흐에 대한 재평가 분위기가 형성될 무렵, 요한나 봉어는 신의 한 수라 할만한 승부수를 띄웠다. 1914~1915년 봉어는 고흐와 테오 사이에 오간 편지를 모두 모아 서간집을 출간했다. 영어 교사 출신답게 서간집의 영문판도 발행해 고흐의 이름이 미국 사회에 알려지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무명의 화가 고흐는 일약 세계적인 스타 화가가 됐다. 심미안과 예술에 대한 열정, 시아주버니에 대한 신뢰 세 가지를 다 갖춘 봉어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 ‘까마귀가 나는 밀밭’, 50.5×103cm, 캔버스에 유화, 1890
세계 최대 규모의 고흐 컬렉션 보유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 1925년 봉어가 63세로 사망하자 큰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조카가 나섰다. 고흐가 죽은 해에 태어나 고흐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조카는 어머니 사후 상속받은 고흐의 유작 전부를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 기탁함으로써 정부 차원의 반 고흐 재단 설립의 물꼬를 튼 일등 공신이다. 빈센트 빌렘은 1973년 여든을 넘긴 노구를 이끌고 반 고흐 미술관 개관 행사에 참석해 저승 세계에 있는 큰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 모두가 기뻐할 큰 선물을 안겼다.
고흐 탄생 120주년인 1973년에 개관한 반 고흐 미술관은 세계 최대 규모의 고흐 컬렉션을 보유한 곳이다. 고흐 그림의 4분의 1 수준인 200여 점의 회화를 비롯해 500여 점의 소묘, 테오와 교환한 편지를 포함한 750여 점의 각종 기록자료 등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화가 인생 10년의 주요 시기별 작품을 망라해 작업 세계 전반을 체계적으로 꿰뚫어 볼 수 있기에 고흐 작품 연구의 요람으로 불리고 있다. 고흐의 인생 역정과 작품 활동의 동기 및 배경, 진행 과정이 꼼꼼히 기록돼 있는 육필 편지 컬렉션도 고흐 일대기를 추적하는 소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수수께끼 같은 고흐 삶의 행적과 작품을 둘러싼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실마리를 암시할 뿐 아니라 몸에 밴 독서 습관에서 비롯된 영적인 세계관과 내적 자아를 형성한 근거가 방대한 편지 컬렉션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고흐에게 편지쓰기는 그림과 함께 자존감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현실 통로였다.
▶1885년 4월 9일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 오른쪽 아래에 고흐의 첫 번째 걸작으로 평가받는 ‘감자 먹는 사람들’ 스케치가 보인다.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82×114cm, 캔버스에 유화, 1885│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인상파 화가 등 작품 600여 점도 감상
고흐 그림 외에도 고흐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상파와 신인상파 화가들의 작품 600여 점을 감상할 수 있는 것도 반 고흐 미술관의 경쟁력이다.
빈센트 빌렘이 고흐의 유작 전부를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 영구 대여하면서 탄력을 받은 고흐 미술관 건립은 1962년 반 고흐 재단 설립으로 가시화됐다. 유족이 소장하고 있던 그림과 드로잉, 습작, 편지, 기타 자료 등 엄청난 양의 고흐 컬렉션에 대한 정부 차원의 매입을 네덜란드 의회가 승인하자 미술관 설립은 급물살을 타게 됐다.
매입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미술관 건립을 내건 유족의 뜻에 따라 1963년 국립 반 고흐 미술관은 네덜란드의 저명한 건축가 겸 가구 디자이너 헤릿 리트펠트(1888~1964)가 설계를 맡으면서 공사가 시작됐다. 1964년 리트펠트가 갑작스레 사망하자 판 딜런과 판 트리흐트가 설계를 이어받아 1973년 6월 10년 만에 반 고흐 미술관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본관에서는 주로 상설 전시가 열리는데 고흐의 그림과 소묘, 고흐가 수집했던 일본 판화 우키요에 등을 관람할 수 있다.
고흐의 유명세로 관람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네덜란드 정부는 미술관 건물 증축을 결정한 뒤 1999년 타원형 형태의 3층 규모의 부속건물을 완공했다. 도시 전체를 하나의 주제로 개발하는 환경건축으로 유명한 일본인 건축가 구로카와 기쇼(1939~2008)가 설계한 부속건물 1층은 아케이드를 통해 본관과 연결된다.
부속건물 지붕과 벽은 티타늄 재질로 만들어졌으며 본관과의 색채 미학적 조화를 고려해 융합력이 뛰어난 회색 톤으로 건물 전체를 아우른 것이 특징이다. 부속건물의 개관으로 미술관 전체 공간은 두 배로 확장됐다.
박인권 문화 칼럼니스트_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