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규, ‘손’, 테라코타, 51×29×15cm, 1968,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원래 이건희 컬렉션이었으나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됐다)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이란 말이 있다. 1945년 영국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이다. 정치권력으로부터 예술 활동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뜻한다. 간단명료하게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로 규정지을 수 있다. 세계 각국에서 문화산업 육성정책의 중요한 원칙으로 삼고 있다.
‘메세나(Mécénat)’ 활동이란 말도 있다. 정부 기관이 아닌 기업들이 문화예술 분야를 지원하는 것을 말한다. 기원은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메디치가(家)는 대를 이어 미켈란젤로 등 수많은 예술가를 후원했다. 우리나라에선 1994년 한국메세나협회가 창설됐다. 현재 200여 기업이 회원으로 참여해 예술가를 지원하고 있다.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 운동이란 것도 있다. ‘국민신탁운동’ 또는 ‘문화유산기금’이라고도 한다. 보존할 가치가 있는 자연환경이나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시민운동이다. 이 역시 1895년 영국에서 시작됐다. 우리나라에선 2000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결성됐다. 멸종위기에 처한 ‘매화마름’ 군락이 있는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일대 농지를 매입한 것이 첫 성과다. 이어서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1916~1984)가 살던 서울 성북동 한옥을 매입했다. 시민문화유산 1호, ‘최순우 옛집’은 이렇게 해서 보존되고 있다.
▶권진규, ‘지원의 얼굴’, 테라코타, 50×32×23cm, 1967,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권진규, ‘가사를 걸친 자소상’, 테라코타, 49×23×30cm, 1969~1970,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노실(爐室)의 천사’, 권진규 탄생 100주년
서울 성북구 동선동, 성신여자대학교 근처 주택가에 있는 ‘권진규 아틀리에’도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 성과다. 권진규의 여동생 권경숙이 2006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 기증했다. 시민문화유산 3호로 지정됐다. 권진규(1922~1973)는 명실공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1세대 조각가다. 그럼에도 작품보다 드라마틱한 삶이 더 유명한 것 또한 사실이다. 이유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 비극적인 삶 때문.
권진규는 쉰두 살에 “인생은 공(空), 파멸(破滅)”이라는 짧은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스스로 목을 맨 곳이 바로 이 아틀리에다. 1959년 일본 생활을 접고 서울로 돌아와 직접 설계하고 2년 동안 손수 만든 작업실이다. 흙을 보관하는 창고와 두 평(6.6㎡) 남짓 작은 생활공간 외엔 모두 작업을 위한 공간으로 꾸몄다.
특히 테라코타 작업을 위한 가마와 조그만 우물까지 만들었다. 이처럼 흙과 불의 생명력에 매료됐던 그다. “돌도 썩고 브론즈도 썩으나 고대 부장품이었던 테라코타는 썩지 않는다”며 테라코타에 애정을 쏟았다. 테라코타에 대한 애착은 각별했다. 단단한 망치와 끌로 때리고 깎고 쪼아가며 만드는 서구의 전통적인 조각 방식에 대한 거부였을지도 모른다. 대신 부드러운 흙을 자신의 손으로 주무르고 붙여가며 형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1000℃가 넘는 뜨거운 가마 속에서 구워냈다. 불 속에서 스스로 몸을 태우며 다시 살아나는 테라코타 작업을 불멸의 숭고한 예술 행위로 인식했기 때문이리라.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함흥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권진규는 이쾌대가 운영하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곧 조각에 뜻을 품고 1949년 일본 무사시노미술대학에 입학했다. 이 학교 조각과엔 시미즈 다카시란 교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미즈 다카시는 프랑스 조각 거장 부르델의 제자였다. 부르델은 ‘지옥의 문’으로 유명한 로댕의 제자였다.
▶내셔널 트러스트에 의해 보존되고 있는 ‘권진규 아틀리에’ 내부 모습│ⓒ허준율
우리나라 근대조각사의 선구자
권진규는 스승의 스승인 부르델과 로댕을 통해 서구 조각의 전통을 익혔다. 하지만 거기에 안주하지 않았다. 불교적 세계관에 바탕에 둔 자신만의 독창적인 조형 세계를 추구했다. 동물(말, 고양이), 여인 흉상, 자소상, 부조, 그리고 불상과 예수상에 이르기까지 그가 남긴 작품 형식은 다양하다.
돌, 테라코타, 건칠(乾漆), 나무 등 거의 모든 재료를 다뤘다. 김복진으로부터 이어지는 우리나라 근대조각사의 선구자로 손색없는 성과다. 마치 전설처럼 전해지는 비운의 천재 조각가가 지닌 조건을 모두 갖춘 듯하다. 미술평론가 최열은 이렇게 말한다.
“리얼리즘을 꿈꾸었던 권진규였으므로 권진규는 자신의 고뇌와 시대의 우울을 일치시킬 수 있었다. 부드러운 흙을 그토록 음울하고 신비로운 것으로 바꿔버릴 수 있는 근원의 힘은 세상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비극과 구원의 양면이 지닌 세상의 긴장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2022년은 권진규 탄생 100년 되는 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 제목은 ‘노실(爐室)의 천사’. ‘노실’은 화로, 즉 가마가 있던 아틀리에를 뜻한다. 서울시립미술관 전시는 5월 22일까지. 7월부터 10월까지 광주광역시 순회전이 계획돼 있다.
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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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