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각장애인으로 국내에서 처음 박사학위를 받은 조영찬 씨와 아내 김순호 씨│조영찬
국내 1호 시청각장애인 박사 조영찬 씨
“대화하지 못하고 주변 상황을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알고 싶다’는 욕구가 쌓여 공부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된 것 같습니다. 공부 말고는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현실은 적막한 우주 같아요. 하지만 우주엔 영롱한 별빛도 있죠. 제 안에 있는 꿈, 그 별빛을 따라 우주여행을 한다고 생각하며 공부했습니다.”
지난 2월 스스로를 ‘산할아버지’라 일컫는 50세의 만학도의 머리에 영광의 ‘구름 모자’가 씌워졌다. 대학에 입학한 지 15년 만에 따낸 박사학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시청각장애인 조영찬 씨가 우주여행에서 꿈을 이뤄냈다. 시청각중복장애를 가진 이가 박사학위를 받은 건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조 씨는 2007년 나사렛대학교 점자문헌정보학과에 입학해 이듬해 신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5년 만에 사회복지학 복수전공으로 학부를 졸업한 뒤 신학과 기독교상담학으로 석사학위를 받는 데까지 또 5년이 걸렸다. 이어 신학 박사학위 준비를 시작한 지 5년, 느리지만 질긴 집념으로 마침내 그는 목표를 이뤘다.
학위논문 제목은 ‘하느님, 언어, 삼관인(三官人)’. ‘삼관인’은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 중 세 가지 감각은 갖고 있다는 의미로 시청각장애인을 일컫는다. 조 씨가 직접 만든 말이다. 가지지 못한 것보다 가진 것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 그 겸손한 결의에 빳빳했던 고개가 절로 수그러졌다.
▶조영찬·김순호 부부의 삶은 다큐멘터리 <달팽이의 별>로 제작돼 2011년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달팽이의 별> 화면 갈무리
속기사가 문자로 강의 전달하면 점자로 읽어
“장애인을 지칭하는 용어들은 없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그런 말들을 자꾸 접하다 보면 갖지 못한 것을 더욱 의식하게 돼요. 그래서 가진 것에 초점을 맞춘 용어를 고민하다 ‘삼관인’이란 신개념을 떠올렸죠. 장애 때문에 힘들다는 생각을 하면 어려운 과정을 이겨내기가 더 힘들어요. 사회복지와 상담 공부를 하며 없는 것보다 가진 것에 집중해야겠단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조 씨는 어린 시절 열병을 크게 앓은 뒤 세상의 빛과 소리로부터 멀어졌다. 그나마 청력은 조금 더 늦게 약해져 말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음성언어를 통한 소통은 불가능했기에 다른 시각장애인들처럼 안마시술사 일을 할 수도 없었다. 중복 장애를 가진 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조 씨의 삶이 바뀌기 시작한 건 서른네 살, 점자단말기를 만나면서부터다. 이를 통해 그는 수많은 책을 읽을 수 있게 됐다. “책 속에선 장애 없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세상을 활보했다”며 한때 소설가를 꿈꿨다는 그가 시처럼 이야기했다.
시청각장애인이 대학에서 국문학을 배울 수 있는 체계가 전혀 없었던 탓에 노선을 변경해야 했지만 그는 ‘갓길’에서도 누구보다 열심히 제 길을 닦았다. 강의는 점자단말기를 통해 음성언어를 문자언어로 ‘통역’해 들었다. 나사렛대학 내 장애학생고등교육지원센터에서 파견한 속기사가 실시간으로 교수의 말을 노트북에 타이핑하면 조 씨는 이와 연결된 점자단말기를 통해 손끝으로 내용를 받아들였다.
그는 “잠시라도 방심하면 내용을 놓치기에 고도로 정신을 집중해야 해 매우 피곤하고 힘들었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열심히 타이핑을 하는 통역자에게 지금도 늘 감사하고 미안하다”고 전했다.
▶2022년 2월 10일 나사렛대에서 열린 박사학위 수여식에서 조영찬 씨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조영찬
눈·귀 돼준 아내와 삶 다큐로 만들어져
조 씨만큼 누구보다 애를 쓴 건 그의 아내 김순호(58) 씨다. 김 씨는 남편이 점자단말기로 읽을 수 있도록 15년 내내 모든 책을 한글 파일로 글자화했다. <공감>과 인터뷰는 기자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질문을 보내면 그가 조 씨에게 전달한 뒤 문자메시지로 답을 받아 응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일상에서도 아내는 남편의 눈과 귀가 돼 늘 함께한다. 사람들이 건네는 말은 아내의 손에서 남편의 손으로 전해진다. 살포시 포갠 두 손, 아내는 피아노를 치듯 남편의 손등 쪽 손가락 위를 톡톡 두드리는 ‘점화(손가락 점자)’로 이야기를 건넨다. 식사할 때 역시 점화로 남편에게 밥과 반찬의 위치를 알려준다. 늘 손을 맞잡고 있으니 싸움이 되질 않는다. 남편은 “손끝으로 만져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건 아내의 손가락”이라고 했다.
부부가 처음 만난 건 1998년 장애인 선교회에서다. 김 씨는 세 살 때 허리를 다쳐 척추 장애를 안게 됐다. 키가 성인 남성의 허리에 닿을 정도인 1m 20㎝다. 조 씨는 “내가 사회생활을 하려면 누군가 함께 생활하며 모든 것을 도와줘야 한다. 아내를 만난 건 기적이다. 결혼을 한 이후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힘겹게 전구를 갈아 끼우고 나란히 서서 설거지하는 평범한 듯 특별한 부부의 일상은 <달팽이의 별>이란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다. 달팽이는 촉각에 의지해 살아가는 시청각장애인을 빗댄 표현이다. 작품은 2011년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점자단말기로 공부를 하는 조영찬 씨
▶아내 김순호씨는 남편의 손 위에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을 움직여 ‘점화(손가락 점자)’로 이야기를 전한다.│조영찬
“힘들게 학위 따고도 일할 곳 없어 막막”
조 씨는 최근 ‘하늘언어교회’라는 이름으로 가정교회를 시작했다. 이를 통해 장애인들과 소통하고 인터넷 카페(‘설리반의 손 헬렌켈러의 꿈’), 온라인 메신저 등으로 신앙 활동을 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일자리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그는 힘들게 학위를 취득하고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현실이 무척 답답하다고 했다.
그는 “국내엔 시청각장애인 박사가 일할 만한 곳이 없다. 같은 장애인이라도 중증도에 따라 직업 선택의 폭이 굉장히 다른데 나 같은 삼관인은 선택권이 ‘0’에 가깝다”며 “갖은 난관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는데도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은 멈출 수가 없다”고 말했다.
“‘안됐다, 힘들겠다’고 동정하는 대신 함께 고민을 나누면 좋겠어요. 사회는 경증장애인 중심의 양적 일자리 확대를 넘어 최중증의 장애인을 위한 맞춤형 일자리나 새로운 직업을 연구해야 해요. 또 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생활의 질을 높일 수 있게 통역과 활동지원사 등을 연결해주거나 취미 생활을 지원해 장애를 가진 이들이 무기력해지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
느리게 주고받은 문자 대화에서 그의 언어는 정확하고 예리한 동시에 문학적이었다. 글을 많이 읽은 덕일 것이다. 그는 한때 소설가를 꿈꿨으나 작품화할 만한 경험을 별로 해보지 못했다고 했지만 누군가에게 그의 삶은 ‘논픽션’으로 가슴속에 갈무리되리라.
그는 소설 대신 삶으로 이야기한다. “태어나서 별을 본 적은 없지만 한 번도 별이 있다는 것을 의심한 적은 없다”고. “가장 값진 것을 보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가장 참된 것을 듣기 위해 잠시 귀를 닫고 있는 거”라고(조영찬 자작 시).
조윤 기자
장애인 보건복지정책, 이렇게 달라집니다
정부가 2021년 대비 10% 증가한 4조 854억 원을 들여 2022년 장애인 보건복지정책을 추진한다. 돌봄, 소득·일자리, 장애인 등록 개선, 건강·생활, 인권 강화 등 총 5개 분야 22개 사업을 통해서다.
먼저 돌봄지원과 관련해 성인 발달장애인이 의미 있는 낮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1만 명에게 월 125시간의 주간활동서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최중증 발달장애인의 주간활동서비스 이용을 적극 지원하기 위해 가산급여를 7400원으로 두 배 이상 늘린다.
장애아 가족의 부담을 덜기 위해 중증장애아동 돌봄지원 시간을 연 720시간에서 840시간으로 늘리고 대상도 기존 ‘기준중위소득 120% 이하’에서 이를 초과한 가정까지 정부가 지원(본인 부담 40%)한다. 장애인이 집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주거·돌봄·취업 등을 통합 지원하는 지역사회 자립지원 시범사업에도 본격 착수하기로 했다.
일자리 분야에선 2022년 안에 장애인 2650명 추가 고용, 월평균 임금 191만 4000원을 목표로 잡았다. 특히 직업재활훈련과 민간 일자리 고용 연계 등을 통해 중증장애인 1000명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다. 장애인 등록 시 국민연금공단에 방문 제출해야 했던 자료는 이제 공단이 직접 확보하며 9월부터는 장애인 교통복지카드로 전국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장애인 학대 신고 의무자로 사회복무요원, 의료기관·재활시설·장애인평생교육시설 종사자를 추가하고 학대 피해 장애아동 쉼터를 설치하는 등 인권 강화에도 힘쓴다.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배리어프리)의무 인증 대상은 공공기관, 지방직영기업, 지방공사까지 확대된다. 보건복지부는 장애인이 알지 못해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도록 그림을 포함한 안내 자료를 장애인 단체와 지방자치단체 등에 배포할 계획이다. 자세한 정책 내용은 보건복지부 누리집(www.mohw.go.kr) > 정보 > 사업에서 볼 수 있다.